아르미니우스 논쟁과 도르트 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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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미니우스 논쟁과 도르트 신조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9.08.27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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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네덜란드의 종교개혁(2)

17세기에 접어들면서 네덜란드 교회는 아르미니우스 논쟁으로 분열의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아르미니우스의 본명은 야코부스 헤르만스입니다. 후에 아르미니우스라는 라틴어로 바뀌어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라 불린 것입니다. 그는 1560년 네덜란드의 오우더바터에서 태어나 개혁주의 신앙 가문에서 양육되었습니다. 그는 우트레흐트와 마르부르크에 유학하여 공부하는 가운데 그의 친척들이 스페인 군대에 의하여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로테르담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얼마 후 레이든 대학에서 공부한 후, 제네바로 가서 베자 밑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1587년 암스텔담으로 돌아와 이듬해에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는 1589년 교회 당국으로부터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던 쿠른헤르트의 글을 논박하고 예정론을 변호하는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쿠른헤르트의 글을 읽는 가운데 그의 주장이 자신과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한 후 침묵하였습니다.

아르미니우스의 자유주의적 신학은 1590년에 가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로마서를 강해하면서 로마서 7장과 9장의 예정 교리에 대하여 의문을 표하였습니다. 특히 어머니의 태중에 있는 자의 구원 문제와 창세전에 인간의 구원이 예정되었다는 칼뱅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영향력이 미미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그의 주장은 관심을 끌지 못하였습니다.

1602년 네덜란드를 휩쓴 전염병으로 유니우스를 비롯한 레이든 대학의 교수들이 병사하게 되자 아르미니우스는 이듬해 유니우스의 뒤를 이어 레이든 대학교의 신학 교수로 임명되었습니다. 아르미니우스는 전염병이 만연할 때 도시를 떠나지 않고 시민들을 간호한 일로 인정을 받아 레이든 대학의 신학 교수로 추천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의 사상을 잘 알고 있던 고마루스가 그의 신학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아르미니우스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고마루스의 지적에 대하여 아르미니우스는 자신의 입장을 ‘타락 후 예정론자’라고 밝히면서, 고마루스를 당시 소수에 불과하던 ‘타락 전 예정론자’라고 비난하였습니다. 1608년에는 그의 신학적 입장을 ‘감상적 선언’이라는 책을 통하여 표명하였는데, 그는 이 책에서 ①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한 중보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임명하기로 작정하였고, ②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다고 한 모든 자를 용납하시며 구원하시고, 완고한 불신자들을 유기하기로 작정하였다. ③ 회개하고 믿는 자를 위하여 필요한 수단을 제공하기로 작정하셨다. 그리고 ④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개인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는데, 그들이 끝까지 믿고 참을 것을 예견하였기 때문이라고 진술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아르미니우스는 바울, 어거스틴, 루터와 칼뱅에 의하여 발전되어 온 예정 교리를 부인하고 사람의 수납 여부에 따라 구원이 주어진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곧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의 구원을 가능하게 할 뿐이지 결정할 수 있게 하지 못하므로 인간의 구원에 관한 궁극적인 원인은 사람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선택 교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 결과로 인한 하나님의 예지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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