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화해와 협력 위해 가시밭길을 자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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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화해와 협력 위해 가시밭길을 자처하다”
  • 한현구 기자
  • 승인 2019.08.14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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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몽양 여운형 선생

기독교 정신 바탕으로 좌우합작 운동…목숨 걸고 연합 외쳐

“남남갈등 몸살 앓는 오늘날 한국에도 ‘몽양 정신’ 필요해”

▲ 미소공동위원회 미국 대표단과 함께한 여운형 선생(오른쪽). 선생은 양쪽 모두의 비난과 모함을 무릅쓰고 민족을 하나로 묶고자 힘썼다.

인류 역사에서 갈등이 없었던 때가 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의 대한민국을 ‘갈등사회’라고 부르는 것은 과한 표현이 아닐 듯싶다. 해묵은 이념갈등부터 지역갈등, 세대갈등, 남녀갈등에 이르기까지 어딜 가든 무슨 사안이든 불꽃이 튀지 않는 곳이 없다.

갈등은 일제의 압제로부터 벗어나 기쁨만 넘칠 것 같던 광복 이후에도 있었다. 해방 이후 어떤 국가를 건설할 것인지를 놓고 좌우가 극명하게 나뉘어 대립했다. 그때 갈라지려는 우리나라를 어떻게든 하나로 만들고자 좌와 우를 오가며 중재자 역할을 감당했던 민족지도자가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몽양 여운형 선생이다.

갈라지려는 민족 사이 화해의 다리가 되고자 했지만 도리어 한쪽에서는 친일협력자라는 모함을, 한쪽에서는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던 여운형 선생. 끝내 극우 청년의 손에 목숨을 잃기까지 폭력에 쓰러질지언정 비폭력 평화의 길을 걷고자 했던 그는 신실한 기독교인이기도 했다.

남남갈등이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이때 ‘좌우합작’ 운동으로 화해와 연합을 추구했던 여운형 선생의 일생을 통해 오늘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짚어봤다.

 

▲ 몽양 여운형 선생

독립운동 이끌었던 실천적 신앙인

몽양 여운형 선생은 1886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선구자적인 면모를 보였는데 그것은 동학에 가담했던 할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부친상을 당한 1906년, 선생은 스무 살의 나이에 집안의 노비를 모두 불러 모아 노비문서를 모두 불태우고 그들을 자유의 몸으로 풀어줬다.

기독교에 대해 처음 접한 것은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갔던 배재학당에서였다. 그를 기독교인으로까지 인도한 것에는 클라크(한국명 곽안련) 선교사가 큰 역할을 했다. 1906년 일가와 함께 기독교에 입교한 여운형 선생은 고향인 양평에 광동학교와 묘곡교회를 설립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로 이름 높은 그가 평양신학교에 다녔던 열정적인 설교가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여운형 선생은 약 5년간 클라크 선교사를 도와 승동교회에서 조사(전도사)로 활동했으며 평양신학교 입학 이후에는 YMCA 활동에 적극 참여해 많은 전도집회와 사경회를 이끌었다.

독립운동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된 것은 1914년 언더우드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중국에 유학을 간 이후 부터였다. 중국에서 적극적 독립운동에 눈을 뜨게 된 여운형은 청년들의 항일독립운동단체 신한청년당을 설립했다. 신한청년당은 이후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김규식을 파리강회회의에 파견했으며 3.1운동과 임시정부의 태동에 뿌리 역할을 맡게 된다.

1920년에는 상해에서 국제공산당 위원인 보이틴스키를 만나 조선의 독립을 지원할 수 있다는 제안을 듣고 고려공산당에 가입했다. 1922년엔 모스크바에서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나 조선의 사정과 독립에 대해 논의했으며 중국혁명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는 분단 이후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혀 그의 독립운동 공훈과 영향력에 비하면 한참 늦은 시기인 2005년에야 뒤늦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게 된다.

 

기독교 정신으로 좌우합작 운동 전개

여운형 선생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이룰 방편으로 사회주의를 택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단순히 사회주의자라는 단어 하나로 정의될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조국을 사랑했던 민족주의자이기도 했고 기독교 정신으로 갈등을 봉합하고자 했던 신실한 신앙인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좌우합작이라는 가시밭길을 걸었다.

학자들은 몽양이 해방 이후 민족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펼쳤던 좌우합작 운동의 바탕에는 기독교 정신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정배 교수(전 감신대)는 여운형 선생을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주의를 수용한 민족주의자”라고 정의하면서 “그가 주창한 좌우합작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등 일체의 이념을 수용하고 극복하려는 시도로서 기독교 정신의 실천적 행위였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또 “몽양은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하나님의 뜻이라 확신했기에 그가 펼친 좌우합작의 신념 역시 그가 믿었던 기독교적 가치관의 연장선에 있다”면서 “그는 서구적 기독교를 그대로 수용했다기보다는 민족을 사랑하는 토착적 기독교 신앙인으로 정체성이 분명했다”고 덧붙였다.

여운형 선생은 원수와도 같던 일제조차도 비폭력과 평화의 정신으로 대했다. 1945년 광복 직전 일제의 항복이 기정사실화되자 조선총독부는 한반도 내 일본인들을 무사 귀국시키기 위해 여운형과 교섭하고자 했다. 이때 여운형은 전국적으로 정치범과 경제범을 석방하고 치안유지와 건국사업에 일체 간섭하지 말 것 등 5개 조항을 조건으로 일본인들을 평화롭게 내보내는 것을 도왔다.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며 일제로부터 당한 핍박을 생각한다면 기독교 정신이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힘든 일이었다.

 

연합과 화해 정신 이어가야

결과적으로 좌우합작 운동은 실패한 이상에 머무르게 됐다. 한민족이라는 대의를 위해 좌와 우를 아우르고자했던 좌우합작운동은 좌우 세력의 갈등 심화로 위기를 겪다 1947년 여운형 선생이 암살되면서 구심점을 잃고 해체되고 만다. 결국 남북이 분단되며 몽양의 꿈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그의 정신은 갈등사회를 지나고 있는 오늘날의 대한민국과 한국교회에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정배 교수는 오늘날 한국의 상황이 여운형 선생이 활동했던 해방정국과 흡사하다고 지적하면서 “종전선언과 함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서 몽양의 시대처럼 남남갈등의 극복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몽양이 주장한 것처럼 민족적 구심력이 외세의 원심력을 이겨낼 만큼 더욱 강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몽양 여운형 선생 기념사업회의 장원석 사무국장 역시 “과거 기독교는 3.1운동을 시작으로 독립운동과 통일운동,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중재자 역할을 담당했지만 최근엔 편향적 모습과 갈등의 중심에 서 있는 모습이 많이 늘어난 것 같다”고 아쉬움을 드러내면서 “이런 모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여운형 선생이 보여준 관용주의와 포용성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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