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갈등의 벽 앞에 기도하는 양국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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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갈등의 벽 앞에 기도하는 양국 교회
  • 김종생 목사
  • 승인 2019.08.14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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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생 목사/글로벌디아코니아센터 상임이사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말이 실감나는 상황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남북관계가 어느 정도 안정궤도에 접어드는가 했더니 북미관계가 꼬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한일관계는 넘지 말아야 할 경계선을 넘어서고야 말았다.

일본의 경제보복은 우리나라의 위안부합의 파기와 대법원 징용배상판결에 대한 대응형태로 나타났다. 그렇지만 그 이면에는 복잡한 또 다른 셈법들이 존재하는 것 같다. 참의원 선거의 승리와 우경화로 나아가려는 정치적 속셈과 한국이 북한이나 중국과 가까워지는 것을 견제하려는 국제정치적 속셈이 숨어있다는 분석도 있다. 그럼에도 역시 한일관계의 핵심은 과거사 문제이다. 한일관계는 끊임없는 갈등이 내재된 상태로 이어지고 있다. 이 해묵은 갈등은 사안에 따라 증폭되고 있다.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한 과거사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채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있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문 대통령은 교계지도자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과거처럼 독재·반독재, 민주·비민주가 아닌 새로운 시대를 향해 손잡고 나아가는 통합된 지혜와 민주주의가 필요한데, 그것이 잘되는 것 같지 않다”며 “정치가 해야 하는 일이지만, 정치가 스스로 통합의 정치를 못하고 있으니 기독교계에서 이를 더 해주시면 고맙겠다”고 요청해 왔다. 이 통합의 화두는 사회학에서 종교의 기능으로 정의해 오듯 한국의 기독교계가 이 엄중한 국난의 때에 반목과 갈등을 지나 사회통합의 요긴한 역할을 담당하기를 희망해 본다.

“어떤 사람이 벽돌로 집을 짓고 있었다. 처음에는 별 무리 없이 진행되는 듯싶더니 모양이 갖춰지면서 점점 벽이 흔들렸다. 벽돌의 낱낱을 꼼꼼히 만지고 들여다봐도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그때 집 짓는 것을 멀리서 구경하던 한 아이가 ‘왜 벽돌이 위로 올라갈수록 커지는 거예요?’ 하고 물어왔다. 그제야 그는 짓고 있던 집으로부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이가 선 위치에까지 다다르자 자신이 짓고 있던 집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맙소사, 아이의 말대로 벽돌의 가로 길이가 위로 갈수록 아주 조금씩 긴 게 아닌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위기에 봉착한 사람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적절한 시야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법이다.”

(정온의 [동계집] 중 ‘수북이 쌓인 책을 즐기다’ 중에서 인용)

한 치 건너에서 집짓는 일을 지켜보던 어린이의 사심 없는 입장과 시선은 문제에서 벗어나 있는 거리가 준 선물이었다. 조금 떨어져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야의 확보가 우선되어야 하는데 당사자이면서 중재자인 양국의 교회가 이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 같다.

한일 양국 교회가 현 시국의 엄중함을 공동으로 인식하고 협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일본그리스도교협의회(NCCJ)가 지난 달 17일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한일관계 회복을 촉구한 건 고무적이다. 양국의 교회가 가진 신뢰와 역량이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함께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간구하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길 제안한다.

“길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상황속에서도 언제나 길이 되시고 문이 되어주신 주님! 한국과 일본이 역사적 상처와 아픔으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연약함을 고백합니다. 일본에게 지난날의 과오를 인정하는 용기를 주시고 우리들에게는 용서하는 믿음을 가지고 화평의 미래로 나서게 하여 주옵소서. 빌라도의 손 씻는 책임전가가 아니라 우리 주님의 십자가가 양국 간 해묵은 앙금을 풀어내는 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양국의 교회가 이때를 위해 존재하게 하시고 당사자와 중재자 되어 엄중한 현실 답답한 벽에 문이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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