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개혁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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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개혁의 가르침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9.08.06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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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8)

낙스의 신학은 전반적으로 칼뱅의 것과 같습니다. 그는 칼뱅의 충실한 제자였습니다. 단지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에서 칼뱅보다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낙스가 개혁에 열중하고 있을 때 스코틀랜드의 새로운 통치자인 메리 스튜어트가 1561년 8월 프랑스에서 귀국하였습니다.

그녀는 왕권신수설에 근거하여 절대 왕정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낙스가 진행시켜 법제화된 가톨릭 미사 금지를 그녀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낙스에 대항하여 스코틀랜드에 오자마자 왕궁의 홀리루드 하우스에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낙스에게는 한 번의 미사가 만 명의 군대가 침공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낙스는 곧 여왕의 미사 행위를 설교로 규탄했습니다. 여왕과 종교개혁자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여왕은 프랑스 궁중에서 음모와 술수를 자연스럽게 배워왔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미모와 부드러운 화술로 스코틀랜드를 통치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낙스는 여왕의 미모와 화술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여왕이 가톨릭 의식에 따라 단리와 재혼하려 할 때 낙스는 이를 공격했습니다. 낙스는 연소한 여왕을 설득시키기보다는 다음과 같이 질책했습니다.

“여왕의 결혼이 당신(낙스)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말씀하셨지요. 혹은 당신이 이 공화국에서 무엇인가?라고 말씀하셨지요. 저는 여왕의 신하입니다. 그리고 비록 백작이나 남작이나 귀족이 아니지만 하나님이 저를 가치 있고 쓸모 있는 자로 만드셨습니다.”

단리가 살해되자 여왕은 보스웰 백작과 개신교식으로 다시 결혼하였습니다. 보스웰은 단리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때 낙스는 메리 여왕의 퇴위와 처형을 주장하였습니다. 낙스가 단순히 여성 통치자가 싫어서 이런 강경책을 폈을까요? 이 부분을 바로 이해하려면 낙스의 정부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낙스는 여성이 통치자가 되는 것을 확실히 싫어하였습니다.

더군다나 통치자가 가톨릭 군주로서 우상 숭배에 빠지는 것은 더 혐오하였습니다. 낙스는 영국에서 메리 튜더가 가톨릭을 국교로 하여 개신교를 탄압하고 스페인 왕과 결혼한 후 곧 사망한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여왕의 잘못된 정책으로 비슷한 사건이 경험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낙스는 교회가 정부의 일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것을 싫어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사회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신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고 말했고 그 일을 위해서 교회 안에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가난하든 부하든 모든 어린이들이 교리를 배울 수 있도록 학교를 열었습니다. 

낙스는 제임스 6세가 스코틀랜드의 스틸링에서 즉위할 때 열왕기하 12장에 있는 소년 왕 요아스에 관해 설교하였습니다. 1567년 12월 의회가 열렸을 때 낙스는 의회의 개회 설교를 하고, 그 의회가 ‘앞으로 모든 왕들은 개신교 신앙을 유지하겠다는 서약을 의무화하고 아울러 교회 모임의 자유와 권한을 인정한 새로운 입법 조항’을 세우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낙스는 1572년 11월 24일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67세였습니다. 그의 시신은 11월 26일 에딘버러에 있는 자일즈교회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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