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귀, 들을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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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귀, 들을 귀
  • 노경실 작가
  • 승인 2019.08.06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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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실 작가의 영성 노트 “하나님, 오늘은 이겼습니다!”-85

마가복음4:22-23> “숨긴 것은 나타나고, 비밀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요즈음 아파트단지는 ‘개판세상’이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개들과 함께 산책을 하거나 무언가 볼 일을 보러 가는 사람들이 흔하다. 목줄이나 가슴줄을 채워서 개들과 산책을 하거나, 애견유모차에 태워서 왕자님이나 공주님처럼 모시고 다니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어떤 이는 휴대용 선풍기까지 장착하여 지극정성으로 개를 봉양(?)한다. 게다가 혹시라도 개가 우울증에라도 걸릴까 봐 걱정이 돼서인지 쉼 없이 개에게 대화를 시도한다. 그런데 개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왜 그래? 무슨 생각해? 엄마 말 좀 들어 봐” 하며 갖은 애교를 개에게 부른다. 공포영화를 보는 것 같다. 사람이 개에게 빙의한 건가? 심지어 요새 가장 영향력 있다는 목사님은 종종 “우리 집 강아지는…” 하면서 강아지 예화 설교(?)를 한다. 

지난 주, 나는 귀가하다가 아파트 단지 안에서 개와 산책하는 할머니를 만났다. 나와 같은 교회에 다니는 B 권사다. 나는 인사치레로 그 개를 칭찬해주었다. “개가 참 영리하게 생겼네요.” - 개주인에게 가장 좋은 축복의 말은 그 사람에 대한 인사나 칭찬이 아닌 그 개에 대한 칭찬과 축복이다. 그러자 B권사는 “그럼요! 우리 XX이가 얼마나 총명한지 말귀를 다 알아 들어요! 웬만한 사람보다 나아요. 내가 사람이랑 말하는 것보다 우리 XX이랑 얘기할 때가 더 속편하다니까요!” 라며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진정으로 행복하고 만족해하는 기쁨이 그득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 기쁨과 만족만큼 인간에 대한 불만족과 미움이 출렁출렁 넘치는 것을 느꼈다. 이건 나의 편견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B권사는 교회에서 아는 사람들만 아는 별명이 있다. 그러나 정작 할머니만 모르는 별명, ‘칼머니’다. B권사는 정의의 사도처럼 혀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훈련을 시킨다. B권사는 날카로운 칼끝으로 사람의 마음을 찌르고, 그래서 피를 흘리게 하는 놀라운 은사(?)가 있다. 

나도 칼침을 맞은 적이 있다. “작가면 세상에서 작가이지, 교회에서도 작가 대접 받으려면 안되지요. 천국가면 작가 같은 게 어디있겠어요? 대통령도 교회에서는 주차 봉사하는 게 교회인데, 그깟 작가가 식당봉사 좀 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그렇게 하다가는 하나님이 작가 은사를 다 뺏아가실 겁니다. 여하튼 요즘 젊은 사람들은 땀 안 흘리고 누리기만 하려니 문제야, 문제. 교회에서 일절 밥을 주지 말아야 해! 교회 밥을 공짜로 먹는 걸 너무 당연하게 여긴다니까! 밥들은 잘 먹으면서 무슨 일만 있으면 우리를 마르다 취급을 하니… 이제 식당봉사하는 노인네들 다 죽으면 누가 교회에서 밥을 할까?”

토요일마다 식당에 나와서 주일 식사준비를 하라는 것인데. 토요일에 강연이 많은 나는 시간을 내기 어려워서 사양했더니 일어난 칼침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분이 온몸으로 교회에서 봉사를 하니 그 누구도 항변이나 반항을 하지 못한다. 

나는 다시 한번 B권사의 개를 칭찬해주고 돌아섰다. 그런데 자꾸 B권사의 말소리가 내 귀를 윙윙 울렸다. ‘우리 XX이가 얼마나 총명한지 말귀를 다 알아 들어요! 웬만한 사람보다 나아요. 내가 사람이랑 말하는 것보다 우리 XX이랑 얘기할 때가 더 속편하다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몇 번씩이나 하셨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 는 외침도 떠올랐다. 

강아지가 사람 말 귀를 알아듣는다지만 뭐 대단하겠는가. 얼마나 잘 알아들어서 사람과 교감하겠는가! 단지 말 못하는 짐승이 눈치나 훈련, 습관으로 사람 말에 반응하는 몇 가지 행동에 주인들은 행복해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고 소리치셨는데 우리에 대한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얼마나 크셨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귀와 들을 귀는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그 날, 나는 B권사에 대한 불편함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50년이 넘도록 교회봉사를 하는 그 분의 답답함이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우리들에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움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단지 사람은 다른 이들이 자기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 때는 원망과 불편, 심지어 관계단절로 이어지거나 우울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 옆에 순간순간 외치신다. “제발 좀 들어라!” 우리는 날마다 귀를 청소하여 말귀가 환해지고, 들을 귀가 또렷해져서 예수님 마음 좀 시원케 하는 자들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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