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초등교육 기반 세우고 부흥사로 복음 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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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초등교육 기반 세우고 부흥사로 복음 전해
  • 이성중 기자
  • 승인 2019.07.23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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⑲ 최연소 민족대표에서 친일로 박희도

■ 연중기획 - ‘그들이 꿈꾸었던 조국, 우리가 꿈꾸는 대한민국’

그동안 본지는 항일 운동의 중심에서 혁혁한 역할을 감당한 인물들을 지면에 소개했다. 이번에 소개하는 박희도라는 인물은 3·1운동의 중심에서 최연소 민족대표로 이름을 올리면서 차세대 지도자로 꼽혔지만 끈기와 뚝심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 약점으로 희대의 천재에서 비극적 변절자로 생을 마감했다. 조금은 불편하지만 변절 이전과 이후 박희도의 행적을 돌아보며 역사적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민족교육자와 전도사로 기독교 부흥에 앞장

그는 1917년 영신학교와 중앙교회에 중앙유치원(현 중앙대학교 전신)을 설립하는 등 교육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특히 중앙유치원의 설립배경을 보면 당시 친일 관료와 배판자본가를 중심으로 소위 ‘귀족유치원’ 의 이미지가 강한 경성유치원과는 차별성을 강조하며 조선의 중류층 자녀들이 다닐수 있는 유치원을 설립했던 것이다.

박희도는 한국사회의 척박한 교육현실 속에서 유·초등교육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애썼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1913년부터 해주지방에서 목회자로 활동 그가 인도한 사경회에서 많은 신자들이 성령의 은사와 변화를 경험하기도 했다. 이는 그가 1907년 대부흥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사경회와 신앙부흥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전형적인 전도사의 모습을 보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당시 조선감리교회는 그를 공식전도사로 파송했다.

▲ 동아일보에 실린 1921년 11월 출옥 보도사진(윗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박희도로 보임)


최연소 민족대표로 3·1운동에 참여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전 당시 사회의 분위기는 기독교계의 3·1운동 참여가 구체화 되고 있었다. 박희도는 1918년 9월 조선기독교청년회 (YMCA)의 회원부 간사를 맡아 남녀 청년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게 됐다. 그가 31세에 최연소로 3·1운동 민족대표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청년들 사이에서의 신망과 영향력, 리더십이 중요하게 작용한 까닭이었다.

또한 3·1운동을 따로 준비하던 청년들은 박희도를 통해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합하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이를 통해 천도교, 기독교 외에 불교의 청년학생의 연합전선도 구축될 수 있었다. 그는 민족대표 33인으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 직후 경찰에 연행됐다. 그는 연행된 후 경찰신문과 예심재판 진술에서 청년의 강단과 의지를 보여주었지만 장기화된 수감생활과 고문 회유와 압박 속에서 조금씩 타협하는 모습은 여타 독립 운동가들과 다른 모습으로 3·1운동의 33인중에 한 사람이면서도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박희도는 3·1운동으로 체포돼 2년형을 선고 받 고 수감생활을 했다.


‘신생활’ 잡지 발행, 검열로 재수감 2년 옥고

그는 만기 출옥 후 일제의 문화통치 정책의 분위기 속에서 교육과 출판업을 통해 민족운동을 새롭게 전개 1922년 ‘신생활’ 이라는 이름의 잡지를 창간했다. 하지만 이 잡지는 비타협적, 언론투쟁을 전개 당시 총독부는 치안방해 혐의로 창간호부터 발매금지 조치를 당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신생활’ 잡지는 이후에도 4, 13, 14호는 압수 6, 12호는 발매 금지를 당하다가 러시아혁명기념 특집호로 발행한 11호와 12호가 문제가 됐다. 동년 12월 22일 검사국은 발매금지와 함께 사장 박희도, 주필 김명식, 기자 신일용과 유진희를 신문지법과 1919년 제령 제7호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 으로 기소했다. 박희도는 이 사건으로 함흥감옥에서 2년여 옥고를 치르고 1924년 말경에 출옥했다.

출옥 후 박희도는 1926년 자치운동단체인 ‘연정회’ 부활에 참여, 당시까지 견지해오던 절대독립론은 포기하고 자치론으로 기울이는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신민호 잡지를 통해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1927년 2월 창립된 신간회에서 총회 간사 를 맡으며, 1929년 8월에는 안재홍, 주요한 등과 함께 신간회 중앙상무 집행위원회 회보 편집위원을 맡아 활약했다.


지도자에서 추락…친일로

그러나 그의 활동은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시련을 겪게 된다. 1934년 3월 17일 ‘조선중앙일보’에 실린 제자이자 친구 부인과 관련한 ‘정조유린 사건’은 그를 교계를 대표하는 지도자에서 파렴치한 위선자로 추락시킨 도화선이 됐다.

정조유린 스캔들은 당시 박희도에 대한 공격의 빌미를 제공해준 사건으로 여운형이 사장이었던 ‘조선중앙일보’에서 이 문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다뤘으며, 박희도의 전향이 보도 배경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와 가까웠던 김승태는 박희도가 언제 어떤 계기를 통해 친일로 전향했는지 확실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의 부일활동은 1937년 증·일 전쟁 직후 시작되었지만 본격적인 친일행각은 1939년 1월 일본어로 된 친일 월간자 ‘동양지광’을 창간하면서 부터다.  이 잡지는 철저한 내선일제와 황도선양의 입장을 표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박희도의 적극적 친일 행각에 대해 1948년 간행된 ‘친일파 군상’에서는 박희도가 사장이 있는 동양지광사는 그동안 잡지 ‘동양지광’을 발행 내선일체화 운동에 적극 협력 하였으며 특히 이 잡지는 '지원병, 징병에 적극 협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제 패망 후 박희도는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다 병을 이유로 풀려났으며, 1951년 사망하기까지 육군정훈학교에서 강의를 한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1958년 제자들이 묘비를 건립하기 전까지 묘비없이 보낸 수년의 세월은 역사의 준엄함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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