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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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싸움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9.07.17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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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162)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6)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낙스를 귀족과 시민들이 환영하였습니다.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시민들이 낙스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것은 우선 신앙적 이유가 가장 컸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스코틀랜드가 급속히 프랑스에 귀속되어 간다는 의구심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섭정이며 가톨릭교도인 ‘기즈의 메리’가 딸을 프랑스의 황태자와 결혼시켜 스코틀랜드를 프랑스에 예속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저들은 깨닫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저들의 예상대로 메리 스튜어트는 1558년 프랑스 황태자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년 뒤에는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16세였던 메리는 프랑스의 왕비이자 스코틀랜드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결혼하던 해 영국에서 메리 튜더가 사망하자,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영국의 여왕이라는 공식 칭호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메리와 사촌 엘리자베스는 서로 친척이었지만 원수가 된 셈입니다.

스코틀랜드는 실제로 메리의 어머니에 의해서 섭정되었습니다. 점점 친 가톨릭 정책이 강해지자 개신교 지도자들은 1557년 말에 ‘복된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회중’을 섬기겠다고 서약하였습니다. 그 후 그들은 ‘회중의 지도자들’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섭정은 이들을 ‘이단자’로 취급하여 박해를 가하였습니다. 

1559년 낙스와 회중의 지도자들은 퍼스에 일단 집결했다가 에든버러에 진군하여 섭정에게 종교개혁을 설득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섭정은 4천여 명의 정부군과 9백 명의 프랑스 지원 부대에게 전쟁 준비를 명령하였습니다. 이때 낙스의 군대는 훈련이 안 된 시민군 5천여 명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군사적으로 열세였던 낙스는 영국 여왕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영국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는 낙스의 여성관에 불만이었지만, 스코틀랜드가 가톨릭으로 남아 프랑스와 연합하여 영국을 위협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불편한 일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국가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만 명의 군대 지원을 약속하였고, 윈터 제독이 1560년 1월, 8척의 함대를 이끌고 낙스의 진영에 도착하였습니다.

낙스는 같은 해 4월부터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큰 성 자일즈 교회를 담임했습니다. 낙스는 그의 후원자들이 이 전쟁에 소극적임을 알고 곧 승리할 수 있다는 전투 정신을 설교로 불어넣었습니다. 낙스는 마리아나 성자들의 화상과 조각을 강하게 배척하였고, 그의 설교를 들은 던디와 퍼스의 사람들은 가톨릭의 많은 성상과 건물들을 파괴하였습니다. 그는 아무리 크고 웅장한 건물이라고 해도 거기에 온통 성상으로 범벅이 되어 신자들이 우상 숭배할 가능성이 있을 때에는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낙스군과 영국 연합군은 1560년 4월 4일 스코틀랜드 동부 해안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리스 지역도 장악해 버렸습니다. 프랑스군은 포위되어 제대로 된 전투 한번 치르지 못하고 휴전을 요청하였습니다. 1560년 6월 11일 스코틀랜드의 섭정 기즈의 메리(메리 스튜어트의 모친)가 돌연히 사망하여 가톨릭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습니다. 그녀는 한 때 “존 낙스의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고 개신교를 멸시하였으나, 임종시에는 개신교 목사 존 윌록 앞에서 그리스도만이 구원자이심을 고백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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