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무역보복, 한서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연중기획 - ‘그들이 꿈꾸었던 조국, 우리가 꿈꾸는 대한민국’ ⑱꽃으로 일제 맞선 남궁억 장로 손동준 기자l승인2019.07.15 20:27:56l수정2019.07.18 08:57l14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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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적 재능 다양하고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위인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열망…여성‧아동 교육에 헌신

▲ 만화 한서 남궁억(제작:키아츠)의 한 장면.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 강산에 일하러 가세!”

이 곡은 1922년 한서 남궁억 선생이 쓴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다. 남궁억 선생은 절망적인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교육으로 나라를 세우고 신앙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했다. 이 곡도 참혹한 현실에 무너지지 말고 신앙으로 일어서자는 뜻에서 쓰였다. 특히 찬송가로 편곡하여 일제의 억압을 피하며 여러 사람의 입에서 불릴 수 있었다.

일제는 특히 남궁억 선생이 지은 노래가 널리 불리는 것을 두려워했다. 1937년 3월 원산경찰서의 한국인 형사가 찬송가에 실려 있는 가사 중에 애국심을 고취하는 곡들을 검열했는데 그때 제일 먼저 금지된 것이 바로 이 곡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었다.

지금도 이 곡은 찬송가 580장으로 수록되어 많은 교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경쾌한 멜로디와 힘찬 가사 덕분에 현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신나게 이 곡을 부르지만 곡을 쓸 당시 59세이던 한서 남궁억 선생은 참혹한 현실 앞에 서 있었다. 남궁 선생은 압제에 무너지지 말고 신앙으로 일어서자는 뜻을 곡에 담았다.

올해로 80주기를 맞은 한서 남궁억 선생은 나라 사랑 운동에 일생을 바친 사람이었다. 구한말 정부의 관리로서, 개화기 독립협회 수석총무와 대한협회 회장 등을 거치면서 청렴과 결백, 나라사랑을 실천했다. 그가 오늘날 살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나라 사랑과 민족 사랑의 본을 보인 선배 신앙인의 삶을 재조명해 봤다.

 

다재다능한 아이디어 뱅크

남궁억 선생은 구한말 고종의 통역관과 구미순방사절단의 통역 서기관으로 일했다. 이때 개화된 문명 세계에 눈을 뜬 그는 서울의 토목국장으로 일할 당시 향후 100년을 내다보고 세종로와 종로의 도로를 정비한다. 지금의 종로 소재 탑골공원을 만든 것도 남궁억 선생이었다.

선생은 문장에 탁월한 솜씨를 보였다. 특히 1898년 황성신문을 창간했는데 이것은 한국 근대 언론의 효시가 됐다. 독립신문 편집 과정에서 주시경 선생과 교류하며 조예를 쌓았는데 당시 ‘어휘는 주시경, 문법은 남궁억’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한일병탄이 되자 비분한 망국의 눈물을 뿌려 우울한 심회를 토로하는 ‘기러기 노래’를 작가하고 미국의 유명한 민요 작곡가 스테판 포스터의 곡을 빌려 배화학당 여학생들과 부르곤 했다.

이밖에도 여러 방면에 매우 재능이 많았던 선생의 삶을 쫓아가면서 받은 인상은 대단한 아이디어 뱅크이자 기획자였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지금도 ‘무궁화’하면 남궁 선생을 떠올릴 만큼 그는 ‘무궁화’를 이용해 민족의 자주의식을 고취시켰다. 항일의 여러 방편이 있겠지만 그가 택한 무궁화 보급은 지금으로 보면 하나의 캠페인을 연상시킨다.

일본의 갑작스러운 무역보복으로 한일관계가 극도로 악화된 최근의 상황을 볼 때 남궁 선생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궁금해진다. 한국고등신학연구원의 김재현 원장은 “그분이라면 분명 항일운동을 하셨을 것”이라면서도 “상대를 욕하며 ‘죽어라’하는 대신 새로운 대안을 찾아서 몸소 실천을 하셨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남궁 선생은 일제가 보급한 벚꽃을 꺾어버리는 대신 무궁화를 보급하는 것으로 대응했다는 것. 김 원장은 “누구나 분노를 느낄 상황이 분명하지만 우리 입에서 욕이 나가게 하기보다 우리가 실제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을 긍정적으로 찾으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 한서 남궁억 선생(한서선교회 제공)

시대 앞서간 여성운동가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는 남성 우위의 사회적 통념이 지배하고 있었다. 여자가 남자에 비해 낮은 대우를 받았고, 교육에 있어서도 여성은 정규교육과정보다 가정에서 받아야 할 교육이 있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누구나 예외 없이 교육받을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으며, 교육이란 공동선을 위한 것이므로 남녀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선구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중 한 명이 남궁억이었다.

남궁 선생은 여성인권과 여성지식인들의 활동, 그리고 여성들의 교육을 새롭게 전개해 나간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직접 교과서를 저술하여 현장에서 여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를 통해 국권회복의 정신과 평등정신을 일깨우는 데 앞장섰다. 무려 20년간 여성교육에 종사하면서 여성의 교육, 여성의 가정에서의 역할 및 애국심고양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1910년 한일합방이 된 뒤 군수직에서 물러나 배화학교 교사로 들어가 여성교욱에 몸을 담고 역사교육과 진보적 여성교육에 중점을 뒀다. 현재호 목사(한서교회)는 “남궁억 선생은 탁월한 여성교육가였다”며 “그는 민족의 미래는 어머니의 젖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했다. 그가 배화학당에서 만든 가정교과서를 보면 여성운동가로서 사랑과 가정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볼 수 있다”고 소개했다.

당시로서 유력자였던 남성이 다른 과목도 아닌 ‘가정교과서’를 만들었다는 사실만 봐도 획기적인 일이었는데 내용은 한발 더 나간다. 그 책에서 남궁억 선생은 시집을 가면 무조건 전도하려 하지 말고 집안 대소사에 잘 협력하여 인정받은 뒤에 하나님의 도를 전하면 능히 전도가 될 것이라는 내용부터 부부간에는 손님처럼 대하라는 내용까지 실제적인 기독 여성의 생활 강령까지 담았다.

 

행동하는 신앙인

남궁억 선생은 1910년 세례를 받고 종교교회에 입교했다. 마흔 여덟 살 늦은 나이였지만 일찍이 선교사들과 교류하며 기독교에 대한 정보를 폭 넓게 취득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1918년 강원도 홍천의 보리울로 낙향하여 학교와 더불어 교회를 먼저 세웠다. 당시 보리울에는 신자가 1명 뿐이었지만 남궁 선생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된다. 그는 춘천에 거주하는 선교사에게 전도인을 보내줄 것을 청하는 동시에 그의 사재 3,900환을 들여 1919년 9월에 대지를 매입하고 열 칸의 기와집 예배당을 건축한다. 이후에 지역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밀려들어와 예배당이 좁아서 앉을 자리가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 한서남궁억기념관과 그 앞에 세워진 남궁억 선생의 동상.

기록에 따르면 남궁 선생은 철두철미한 교회생활을 했다고 한다. ‘한서 남궁억의 생애’에서 저자 김세한은 “그의 신앙은 형식화된 범신자들과는 달랐다”고 표현하면서 “선생은 철두철미한 교회생활을 했다. 술과 담배를 금하는 것만이 신앙으로 아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는 이런 형식론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다”고 적었다. 남궁 선생은 신경통이 있어서 솔옹지, 우슬초 뿌리, 창출, 오가피를 술에 넣어 약주를 빚었는데 이것을 하루에 한 컵씩 복용했다. 혹자는 술을 마신다고 하여 이단시했으나 선생에게는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었고 신앙의 동요를 받지 않았다. 성직으로는 그때 본처 전도사의 직책을 가졌으니 지금의 장로와 대등한 성직이었다.

현재호 목사는 남궁억 선생에 대해 실천하는 기독교인이자 말씀에 대한 이해가 누구보다 깊었던 분이라고 말했다.

“남궁억 선생님이 제자들에게 선물한 10폭짜리 병풍을 보면 한글서예본인데 거기에 성경말씀이 적혀있습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 그리고 그 속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지가 적혀 있습니다. 글의 마지막은 사랑과 감사로 끝이 납니다. 그분은 성경 66권을 통달하고 계셨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복음의 핵심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풀어낼 수 없었겠지요.”

현 목사는 마지막으로 남궁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전한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그분이야말로 가장 기독교인다운 기독교인이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시대는 힘이 지배했지만 앞으로의 시대는 사랑이 지배할 것이라는 게 그분의 마지막 말씀이었습니다. 남궁 선생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독립운동가이면서 복음의 핵심인 사랑을 결코 놓지 않았습니다.” 

손동준 기자  djson@igood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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