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은 하나님의 정의에 부합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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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은 하나님의 정의에 부합하는 일이다
  • 강원돈 교수(한신대학교 기독교윤리)
  • 승인 2019.07.03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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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정의를 가난한 사람들의 배려와 보호에 직결시키는 성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생존에 필요한 소득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여러 모티프들을 제공한다. 만나 이야기(출애 16:1~36), 주기도문(마태 6:11; 누가 11:3 병행), 포도원 주인의 비유(마태 20: 1~16), 최후심판의 비유(마태 25:31~46)가 그것이다.

만나 모티프는 주기도문 제2항목 첫째 기원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에 다시 등장한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루터의 해석은 매우 중요하다. 그에 따르면 ‘일용할 양식’은 “삶을 위한 양식과 필수품에 속하는 모든 것, 먹는 것, 마시는 것, 옷, 신발, 집, 정원, 경작지, 가축, 현금, 순수하고 선한 배우자, 순박한 아이들, 착한 고용인, 순수하고 신뢰할 수 있는 통치자, 선한 정부, 좋은 날씨, 평화, 건강, 교육, 명예, 좋은 친구, 신용 있는 이웃 등”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인간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는 모든 것이다. 이 ‘일용할 양식’은 나 혼자 차지해서는 안 되고, ‘우리’ 모두에게 허락되어야 한다. ‘우리’가 모두 “똑같은 기본적 필요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 필요를 집단적으로 충족시킬 때 우리는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도 자명할 것이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업적에 따른 정확한 분배’를 뒤집어엎는 ‘하나님의 기이한 의’를 묘사한다. 하나님의 정의는 노동의 업적과 무관하게 삶의 필요에 따라 재화를 나누어 주는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 업적과 보상을 서로 분리하고, 보상과 삶의 필요를 직결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이다. 그것이 기이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업적과 보상을 서로 결합시키는 일이 마치 하늘이 정한 법인 양 생각하는 통념이 그만큼 강력하게 자리를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통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노동할 기회가 전혀 없거나 노동 업적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필요에 따른 분배에 참여할 기회를 얻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개할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궁핍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최후심판의 비유는, 하나님의 정의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기본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연대하여야 한다는 것을, 전율적으로 증언한다. 최후의 심판자가 의로운 사람들에게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는 것이다.(마태 25: 35~36) 이와 같은 이웃의 기본 욕구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에 따라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결정되고 우리의 미래의 삶이 결정된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하느님의 정의는 ‘일용할 양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전제없이 그것을 부여할 것을 요구한다. 루터가 해석한 ‘일용할 양식’의 내용은 오늘 우리가 말하는 기본소득과 맥이 통한다. 수고한 사람이나 수고하지 않은 사람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주어 그들이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갈 기회를 주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하고 해방하는 정의에 부합하는 일이다.

한신대학교 기독교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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