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리선 ‘노트르담’ 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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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리선 ‘노트르담’ 호에서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9.07.02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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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4)

낙스의 열정적인 설교에도 불구하고, 감정적으로 모인 훈련되지 않은 시민들과 조직 없는 수비대는 가톨릭과 왕실을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스코틀랜드 왕실은 섭정, 기즈의 메리(제임스 5세의 미망인)를 통해 프랑스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낙스가 세인트 앤드류 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왕실과 프랑스가 군대를 동원하여 공격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곳 수비대에 남아 프랑스와 투쟁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영국과 스코틀랜드 모두가 내정 문제로 골치를 썩는 동안 개신교도들은 이 성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여유를 얻자마자 응원군을 파견하였습니다. 스코틀랜드 왕실도 이 성에 강력한 군대를 파견하였습니다. 

개신교도들은 모든 힘을 다해 대항하였으나 그들은 힘으로 볼 때 너무 열세였습니다. 1547년 7월 말 프랑스 제독 레옹 스트로찌의 지휘 아래 도착한 20여 척의 갤리선 대포가 세인트 앤드류 성을 포격하자 결국 얼마 견디지 못하고 낙스를 포함한 전 수비대원들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낙스는 19개월 동안 프랑스 갤리선 ‘노트르담’ 호에서 노 젓는 노예로 일했습니다. 노트르담이 소속한 함대는 여름엔 루앙에 주둔하여 영국 해적들의 침략 행위를 방어하였고, 겨울에는 본거지인 낭트에 주둔하였습니다.

낙스는 노예 생활을 통해 인간의 가혹성과 잔인성을 보았습니다. 그가 치룬 노예 생활은 참담한 것이었습니다. 밤에는 의자에 묶인 채 잠이 들었으며, 낮에는 뜨거운 태양, 비, 바람, 추위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배를 수선하거나, 청소할 때, 혹은 겨울에는 육지에 있는 오두막에서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갖가지 곤경을 당해야 했습니다. 낙스와 그의 동료들은 프랑스에서 가장 악질적인 죄수들과 함께 섞여 살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동정녀 마리아 형상의 발에 입을 맞추라고 하면서 낙스에게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포기하라고 시도한 적도 있지만 낙스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노예 생활을 통해 낙스는 세계관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삶은 비록 힘들었지만 다른 국가의 종교개혁과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어떻게 종교개혁을 이끌어야할 것인지에 관해 낙스는 부단히 생각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낙스는 절망스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름 없는 사람으로 갤리선에서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언젠가 자신을 쓰시기 위해 훈련시키신다고 믿었습니다. 아울러 이 고통의 시기에 그는 낭트 주위에 살고 있는 프랑스 개혁주의자들과 산발적으로 친교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1549년 영국 정부의 교섭으로 낙스는 극적으로 해방되었습니다. 영국에서 낙스의 중요성을 깨닫고 포로 교환의 방법으로 그를 구해낸 것입니다. 영국 왕실의 후원을 받은 낙스는 잠시 스코틀랜드의 귀환을 보류한 채 5년 동안(1549-1554), 베릭과 뉴캐슬에서 목회로, 런던에서는 설교로 그리고 대주교 크랜머와는 따뜻한 우정을 나누며 유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노예 생활로 인해 생긴 위궤양과 신장염도 목회 기간 동안 치료되어 갔습니다. 성경 연구와 좋은 주석을 읽는 데도 열심을 내었습니다. 후에 그의 아내가 된 노햄성 장군의 딸인 마조리 보우즈도 이때 알게 되었습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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