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을 내던져 불의에 맞섰던 푸른 눈의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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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을 내던져 불의에 맞섰던 푸른 눈의 한국인
  • 한현구 기자
  • 승인 2019.06.19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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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 34번째 민족대표 스코필드 박사

3.1운동·제암리 학살 생생하게 카메라에 담아 일제 만행 알려

해방 이후 적극적 언론 활동…사회와 교회 향해 날카로운 비판

▲ 광복 이후 한국에 돌아와 후학을 가르치던 스코필드 박사의 모습.

“국민은 불의에 항거해야만 하고 목숨을 버려야만 할 때가 있다. 그럼으로써 일종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고 조금은 광명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유일하게 거사 계획에 대해 통보받고 협력을 요청받았던 외국인. 실제 3.1운동에 참여한 한국인들을 적극적으로 돕고 시위 현장에 사진기를 들고 나타나 역사적인 기록을 남겼던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1889~1970). 그는 3.1운동과 일제의 폭거가 세계 곳곳에 알려지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 ‘34번째 민족대표’라고 불렸다.

역사는 그를 3.1운동의 기록자로 기억하지만 이는 스코필드 박사가 일평생을 바쳐 전한 한국사랑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1916년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로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그는 언제나 한국인의 편에 서서 불의에 맞섰고 일제의 살해위협으로 한반도를 떠나 있을 때도 쉬지 않고 한국 독립을 위해 뛰었다. 광복을 맞아 국빈 자격으로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교육자로 후학을 양성하고 보육원에서 어려운 아이들을 돌보면서 헌신했으며, 1970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국립묘지에 안장될 때까지 한국사회를 향한 애정이 담긴 날카로운 비판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

언론활동으로 일제의 만행 알리다

스코필드 박사는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격언을 삶으로 보여준 인물이다. 1919년 3.1운동을 하루 앞둔 2월 28일 저녁 세브란스병원에서 일하던 이갑성이 스코필드 박사에게 거사 소식을 알려왔다. 이갑성은 박사에게 독립선언문을 영어로 번역해 백악관에 보내줄 것과 파고다 공원에서 있을 학생 시위에 와서 사진을 찍어줄 것을 부탁했고 박사는 기꺼이 조선인 친구의 부탁을 듣고 공원으로 나섰다. 그가 찍은 3.1운동 초기의 사진은 3.1운동을 필름에 담은 유일한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있다.

제암리 학살사건의 아픈 역사도 그의 카메라에 담겼다. 3.1운동이 일어나고 약 한 달이 지난 4월 17일 스코필드 박사는 수원 남부 지방에서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일본 군인들이 기독교인을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지른 후 총을 쏴 수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다는 소문이었다.

소문을 들은 박사는 일본 헌병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수원역부터 사건현장까지 자전거로 산길을 돌아 접근했다. 안타깝게도 소문은 적나라한 사실로 드러났다. 일본 헌병들은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이유로 교인들이 중심이 된 주민 30여 명을 교회에 몰아넣고 총을 쐈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불을 질렀다. 사건 현장을 보고 분노한 스코필드 박사는 현장을 사진에 담아 미국으로 보내 일제의 만행을 알렸다.

언론을 포함 여러 수단을 동원해 조선인들을 돕던 스코필드 박사의 활동은 일제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던 캐나다 선교부에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일제의 미움을 사 살해 위협까지 받았던 박사는 1920년 세브란스병원과의 계약 기간이 만료돼 캐나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박사의 한국사랑은 본국에서도 식지 않았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연이나 글을 통해 한국의 상황을 알리고 일제의 잔혹함을 비판했다. 1926년 쓴 글에서 “나는 ‘캐나다인’이라기보다 ‘조선인’이라고 생각됩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해방 이후에도 선지자적 목소리

스코필드 박사가 독립에 기여한 공적에 비해 해방 이후의 행보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해방 이후에도 스코필드 박사는 한국의 가난한 민중들에게서 결코 눈을 떼지 않았고 불의에 눈을 감지 않았다. 그가 꿈꿨던 나라와 교회에 대한 생각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오히려 이때부터다.

캐나다에서 우리 민족의 광복을 목격했던 스코필드 박사는 1958년 이승만 정부의 초청을 받아 국빈 자격으로 한국에 돌아온다. 하지만 정부의 국빈 대우는 금세 경계와 견제의 시선으로 뒤바뀐다. 당시 이승만 정부의 부정과 부패, 언론 탄압 등 불의에 대해 적극적으로 선지자적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에 돌아온 다음 해인 1959년 1월 ‘민심은 공포에 잠겨 있다. 의사당 앞에 무장경관이라니’라는 제목으로 글을 발표하고 국회의사당을 무장 경관이 둘러싸고 있는 것은 공산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라며 언론의 자유를 탄압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스코필드 박사가 해방 이후 한국교회의 모습을 지적한 글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강한 찔림을 준다. 1961년 기독교사상에 기고한 ‘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에서 박사는 3.1운동 당시 교회의 모습과 1960년대 교회의 모습을 비교하며 “40년 전 교회는 부패하지 않았는데 현재의 한국교회는 부패했다.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독재적 대통령이 탄생하자 교회는 물질적인 부요를 추구했고 기독교의 원칙을 배반해버렸다”고 꼬집었다.

그는 계속해서 “예수께서는 재물이 인간의 영혼에 가져오는 위험을 거듭 경고하셨음에도 대부분은 일신상의 안정과 쾌락을 위해 부단히 재물에 손을 대고 있다. 이런 세속적 부패가 사람들이 교회에 대하여 품고 있는 온정과 존경을 말살시키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안티 기독교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져가는 오늘날의 현실에서도 귀 기울여 살필만한 대목이다.

숙명여대 이만열 교수는 이런 스코필드 박사에 대해 “그는 자신의 안위를 고려하지 않고 한국인의 고난당하는 삶을 살폈다.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우며 일제에 대한 비판을 회피했던 다른 선교사들과는 큰 차이를 보였다. 그는 자기 조국 못지않게 한국을 사랑했으며 분명한 원칙과 신념을 가지고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 보였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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