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낙스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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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낙스의 등장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9.06.18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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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2)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은 순교자들과 시민운동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순교자의 신앙을 계승하며 시민운동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존 낙스(1505~1572)입니다. 낙스는 에딘버러에서 가까운 하딩톤에서 존경은 받았으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글라스고우 대학교에서 공부한 후, 25세에 신부로 서품을 받았습니다.

사제가 될 때까지 낙스를 인도한 것은 스콜라 철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만족할 수 없어 교부들의 글을 읽기 시작했고, 거기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주로 제롬과 어거스틴이 그의 관심을 끌었는데, 그는 제롬으로부터 성경만이 하나님의 진리의 순수한 원천이라는 것과 성경을 원어로 읽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어거스틴에게서는 하나님의 은총인 성경의 내용을 신뢰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존 낙스는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사상과 하인리히 불링거의 영향을 받아 스위스 신앙고백을 영어로 번역한 조지 위샤트의 후견인 집에서 가정교사로 있으면서 위샤트를 만나 크게 감화를 받아 종교개혁 사상을 직접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조지 위샤트의 지지자가 된 존 낙스는 그가 설교할 때면 칼을 들고 그를 호위하곤 하였습니다. 이때가 1545년에서 1546년으로 넘어가던 겨울이었습니다.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의 경비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1545년 12월 위샤트가 검거당하고 1546년 3월 1일 에든버러 캐슬로 옮겨 구금되었는데 그때 낙스도 스승을 따라 검거되어 죽기로 각오할 정도였습니다. 위샤트는 1546년 3월 1일 세인트 앤드류에서 추기경 데이빗 비튼에 의하여 화형에 처하여졌습니다. 위샤트가 순교한 후에 존 낙스는 적극적으로 종교개혁 운동에 가담하여 전 생애를 스코틀랜드의 개혁에 바치게 되었습니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상황은 모든 면에서 종교개혁을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나라 전체 부의 반 정도를 성직자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것도 소수의 지도자들 손에 있었습니다. 탐욕과 야심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여 세속 권력과 다투고 있었습니다. 사제들은 모든 면에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타락하였고 신앙은 완전히 미신화 되어 있었습니다. 

영국의 북쪽에 있었던 스코틀랜드는 역사적으로 영국과 적대 관계인 프랑스와 가까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영국의 헨리 7세가 자기 딸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와 혼인시키면서 두 나라는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헨리 8세가 개신교로 전향하자 왕실은 다시 프랑스와 전통적인 동맹 관계로 선회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두 나라는 교회의 개혁과 교황과의 관계에 있어서 서로 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교황과 결별한 영국과는 달리 스코틀랜드는 프랑스를 따라서 확실하게 가톨릭을 신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개신교 사상이 스코틀랜드에 스며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전부터 이미 후스의 사상이 퍼지고 있었고, 독일에 유학했던 사람들이 루터와 다른 개혁자들의 글을 가지고 고국에 돌아왔습니다. 무서운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봉자들은 불어났습니다. 특히 왕실의 세력이 강화되는데 대한 반감으로 많은 귀족들이 개신교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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