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트릭 해밀톤의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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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해밀톤의 순교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9.06.11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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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1)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많은 선구자들의 헌신에서 비롯하였습니다. 1407년에는 영국의 위클리프파 신부였던 제임스 레스비가 퍼스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화형에 처하여졌고, 1433년에는 보헤미아 출신의 의사요 후스파 선교사인 폴 크라바르가 성경을 가르친 일로 세인트 앤드류에서 처형되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이 대륙의 전역으로 번져 나가자, 1525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루터의 신학 사상을 ‘추하고 악한 교훈’이라고 비난하면서 종교개혁의 확산을 금하는 법을 제정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26년부터 영국의 개혁자 윌리엄 틴들의 종교개혁 사상이 스코틀랜드에 소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운동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계명성’이라고 불리는 패트릭 해밀톤(1504~1528)에 의하여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왕손(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5세의 친척)이자 귀족 출신이었으므로 14살의 어린 나이에 페른의 수도원장에 임명되었습니다. 

그후 파리에서 유학할 때 독일의 비텐베르크 대학교에 가서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하여 공부하면서 루터의 글을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비텐베르크에서 루터와 멜란히톤을 만났으며, 개혁자들이 새로 세운 대학을 살펴보기 위해 마르부르크를 방문하였고, 조국 스코틀랜드로 돌아가 자신이 깨달은 참된 복음을 알려야 하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리고 1527년 말, 23세의 해밀톤은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습니다.

해밀톤은 귀국과 동시 공개 토론과 설교를 통해 교회 개혁운동을 전개했습니다. 해밀톤은 설교를 통하여 ‘성지 순례, 연옥, 성자에게 기도하는 것,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비판하고, 순수한 초대 교회 신앙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1528년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던 세인트 앤드류의 대주교 제임스 비튼은 해밀톤에게 세인트 앤드류 회의에 참석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음모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세인트 앤드류에 온 해밀톤은 한 마디 토론이나 대화도 못하고 이단으로 몰려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2월 28일 24세의 젊은 나이에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 정문 앞에 있는 세인트 샐바터 타워로 끌려갔습니다. 화형 장소에 이르러 해밀턴은 오랫동안 자신과 함께 했던 종에게 외투를 모두 벗어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옷은 불 속에서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너에게는 도움이 될 것이다. 이것 외에 너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하지만 나의 죽음을 모본으로 삼기를 바란다. 심판 날에 더 고통스럽고 잔인한 것이 있겠지만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사악한 세대 앞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는 그 영생을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

끝으로 해밀턴은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드린다고 기도를 올리면서 그의 눈은 하늘을 향했습니다. 화약을 근처에 뿌리고 장작들을 곁에 놓아두고서 불을 붙였으나 처음에 타오르다가 꺼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손과 얼굴이 검게 타고 말았습니다. 화약을 다시금 그의 몸에 붓고 불을 붙이자 해밀턴은 24세의 어린 나이로 스코틀랜드의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복음을 사랑했던 순교자 해밀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아, 그를 태우던 연기는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을 그들이 말하는 소위 ‘이단의 보금자리’로 만들었습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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