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만이 우리 민족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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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만이 우리 민족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
  • 한현구 기자
  • 승인 2019.06.05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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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 원수까지 사랑한 신앙인 월남 이상재

54세에 감옥에서 회심, 열혈 독립운동가에서 기독 신앙운동가로

좌우 모두에게 존경받은 위대한 민족지도자, 장례에 10만 인파 몰려

▲ 이상재 선생이 주도했던 서울YMCA 초창기 모습.

서구 문물이 흔치 않던 일제강점기. 한 선교사가 비누를 선물하자 사람들이 너도나도 써보겠다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때 한 남자가 나타나 비누를 싹둑 조각내 씹어 먹어 버렸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말리자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이게 비누인 줄 압니다. 그러나 속은 더러운데 겉만 깨끗한들 무슨 소용이요? 나는 먼저 속부터 깨끗하게 하겠소.” 그가 바로 한국기독교가 낳은 위대한 민족지도자, 월남 이상재 선생(1850~1927)이다.

54세라는 늦은 나이에 기독교인으로 회심했지만 하나님 나라를 향한 믿음과 신념은 누구보다 분명했다. 70세를 넘긴 말년까지도 스스로를 “청년 이상재”라 소개하며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외쳤던 열정의 사람. 독립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두고도 이념으로 갈라져 분쟁과 반목이 계속되던 시기, 좌우 양쪽으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았던 몇 안 되는 독립운동가. 이상재 선생의 삶을 통해 그가 꿈꿨던 조국과 오늘의 대한민국을 조명해 본다.

 

▲ 월남 이상재 선생.

54세에 감옥에서 회심하다

이상재 선생은 1850년 충청남도 한산(지금의 서산)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온건개화파로 분류되던 박정양의 집에 식객으로 머물며 개화사상을 접한 그는 미국에서 선진사회를 경험하고 귀국한 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활동을 전개했다. 1896년에는 서재필, 윤치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해 민중 계몽 운동에 앞장섰으며 만민공동회에서 외세의 내정 간섭과 이권 침탈을 성토하기도 했다.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간신들이 바친 뇌물을 보자기째 난로에 던져 태워 버릴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었다.

이상재 선생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1903년 개혁당 사건으로 구금된 한성감옥에서였다. 당시의 감옥 사정은 매우 열악했기에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이들을 위로하며 복음을 전했다.

선교사가 전해 준 성경을 받아 읽었지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대목이었다. 민족의 원수인 일본을 사랑한다는 것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생은 감옥에서 신비로운 일을 경험했다. 브로크만 선교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상재 선생은 환상을 통해 ‘위대한 왕이 보낸 사자’를 만난다. 그 사자는 선생에게 여태껏 두 번의 기회를 줬음에도 회심하지 않았음을 나무라며 감옥에 갇힌 것 역시 신앙을 갖게 하려는 또 하나의 기회라고 말한다.

이런 체험 이후 이상재 선생은 사도 바울이 그랬듯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변화됐다. 그 뒤로 선생은 보복을 다짐하며 증오했던 정적들에 대한 적대감을 버리고 용서의 길로 돌아섰다. 브로크만 선교사는 이상재 선생이 기독교인이 된 이후 아주 엄격하게 새벽마다 기도하고 성경을 외웠으며 다른 이에게도 자신과 같이 하기를 권했다고 증언한다. 선생의 나이 54세 때의 일이었다.

 

투쟁 노선에서 기독교 신앙운동으로

기독교에 입교한 이후 이상재 선생은 독립운동의 노선도 달리했다. 독립을 위해서라면 과격한 수단도 불사하던 투쟁 노선에서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YMCA 활동으로 방향을 틀었다. YMCA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 자강운동을 위해 설립된 민족운동단체 활동과 벼슬인 참찬의 직무마저 소홀히 할 정도였다.

회심 후 이상재 선생은 외형적 힘을 기르는 것이 곧 문명국이 되는 것이란 사회진화론에 더 이상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이 살 유일한 길은 기독교”라 외치며 YMCA의 기독교 운동과 교육으로 청년들에게 역사의식을 심고 올바른 심성을 함양시키는데 온 힘을 쏟았다.

이상재 선생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결코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그의 정신은 누구보다 맑고 또렷하게 하나님 나라를 바라봤다. 선생은 하나님의 정의와 인도하심이 자신이 속한 한국뿐 아니라 모든 국가와 민족, 사회에 나타날 것임을 확신했다. 그렇기에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이 힘만을 추구하는 하나님이 없는 사회임을 안타까워하며 증오심만으로 일제를 바라보지 않았다.

조국의 상황을 통찰하는 인식도 남달랐다. 선생은 일제가 힘을 믿고 한국을 삼킨 것은 하나님이 한국에 주신 권리를 침탈한 것이라 비판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중심이 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거부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선생은 일제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 의해 망하게 될 것이라 확신했다.

 

좌와 우, 원수까지 품었던 신앙인

남다른 위트와 촌철살인의 말솜씨로도 유명했던 이상재 선생은 영원한 청년이었다. 말년에 자신을 소개할 때도 “청년 이상재”라고 소개하며 청년들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즐겼다. 그것을 본 친구가 청년들의 버릇이 나빠지겠다고 충고하자 선생은 “내가 청년이 돼야지 청년들더러 노인이 되라고 할 수는 없잖나. 그래야 청년이 더 청년 노릇을 할 수 있다네”라고 답했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신앙인이었던 선생은 모두에게 존경받는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팽팽히 대립하던 좌우진영도 이상재 선생이라면 믿고 중재를 맡길 수 있는 사람으로 신뢰했다. 1927년 이념을 초월해 민족단일 전선으로 독립운동을 펼치고자 했던 신간회 회장으로 추대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80세를 바라보던 고령의 민족지도자는 그해 민족의 독립과 기독교 신앙운동이라는 과제를 남기고 눈을 감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에는 10만 명이 넘는 추모객이 몰렸다고 전해진다.

서울YMCA 이사 이기열 목사는 “이상재 선생은 기독교인으로서 민족의 지도자로서 삶으로 본을 보인 신앙인이었다”며 “선생과 같이 나보다 공동체를 생각하는 참 지도자가 지금 한국교회에도 나올 수 있길 기도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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