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민관 시대와 왕정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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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민관 시대와 왕정복고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9.06.04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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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영국의 청교도 운동(5)

찰스의 처형으로 영국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때 권력을 잡은 이는 올리버 크롬웰입니다. 

1642년 국왕 찰스 1세와 의회 사이에 무력항쟁이 시작되자, 크롬웰은 국왕파에 대항하여 주를 지키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그는 에지힐을 비롯하여 그밖의 전투를 통해 의회군의 훈련 부족을 통감하고, 동부 여러 주에서 열렬한 청교도들을 모아 엄격한 훈련을 시켰으며 몸소 기병을 거느리고 싸웠습니다. 그 효과는 마스턴 무어와 네이즈비의 두 전투에서 유감없이 나타나 철기대(鐵騎隊)라는 명칭과 함께 그 명성을 드높였습니다. 그 결과 제1차 내전이 끝난 시점에서 크롬웰은 가장 유력한 의회파 지도자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사회의 불안을 정돈시켰습니다. 우선 아일랜드의 반란을 평정하고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국왕파의 폭동도 진압했습니다. 크롬웰은 내친 김에 개혁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국가의 권력을 손에 쥘 수밖에 없었던 그는 호민관의 칭호를 채택했습니다. 그는 장로교, 침례교 그리고 일부의 온건한 감독파들까지 공존할 수 있는 종교 체제를 만들어 보려고 하였습니다. 경건한 청교도였던 그는 주일 성수, 경마, 투기, 극장에 관한 여러 가지 입법을 통해서 영국의 풍속을 개혁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세운 경제 정책은 중산층을 위한 것이어서 귀족층과 극빈자들은 자연히 호민관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크롬웰은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 평안하게 영국을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전의 왕들처럼 의회와는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왕좌를 권했지만 그는 계속 공화정을 주장하였습니다. 거룩한 왕국을 추구했던 그는 1658년, 자기의 임종이 가까웠음을 알고 셋째 아들인 리처드를 후계자로 지명하였지만 아들은 이 자리를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크롬웰의 죽음과 함께 청교도의 시대도 끝이 났습니다. 청교도들이 소망하던 나라는 사라지고 옛날 상태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영국은 제네바가 아니었습니다. 영국인들은 너무도 경건한 신앙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옛 왕조를 그리워했고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청교도에 대한 강한 반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의회는 장로교의 제도를 거부하고 전통적인 감독 제도를 다시 도입하였습니다. 그리고 반대파들을 처벌하기 위한 법률을 만들었습니다. 이제 국교를 따르지 않는 이들은 교회에 발붙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다시 장로교 목사들은 그 자리에서 쫓겨나기 시작했으며,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있던 크롬웰의 묘는 국왕 살해의 장본인이라 하여 파헤쳐졌습니다. 반란과 폭동이 발생하였고 장로교 측 반란군은 처절한 살육전 끝에 완전히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찰스 2세는 자신이 가톨릭 신자임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동생이며 나중에 왕위를 계승한 제임스 2세도 그리하였습니다. 영국인들은 장로교도들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영국인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켜 오렌지 공 윌리암을 맞아들여 왕으로 삼았습니다. 제임스는 통치 3년 만에 프랑스로 도주하였습니다. 이제 영국에서는 누구든 왕실에 충성하고 1520년의 39개 조항에 서명하면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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