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1세와 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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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1세와 내란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9.05.28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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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청교도 운동(4)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은 사람은 아들 찰스 1세였습니다. 영어로는 ‘찰스’, 독어로는 ‘카를’, 불어로는 ‘샤를’, 스페인어로는 ‘카를로스’, 화란어로는 ‘카를’로 부르는데 모두 동일 인물의 이름입니다. 그도 아버지처럼 왕실의 강력한 중앙 집권을 원했으므로 의회와 사이가 나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공주와 결혼했는데 결혼을 위해서 영국의 가톨릭들에게 많은 양보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새 왕비와 수행원들은 가톨릭으로 의식을 행하도록 허락받았습니다. 왕비는 구약의 음녀 이세벨로 비유되며 영국민의 미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당시 청교도적이던 의회는 강한 불만을 표시하였고, 찰스는 모든 문제에서 의회와 충돌하였습니다. 1629년 그는 의회를 무시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나라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그렇게 11년을 보냈는데 이 기간 동안 물가는 오르고 귀족들만 입장이 좋아졌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경제적인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왕의 자문은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오드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청교도 성직자들이 국교회에 대항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큰 벌금을 부과하고 뺨에 ‘선동자’의 약자를 낙인으로 찍었습니다. 귀를 자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윌리엄 로오드는 1645년 이러한 형벌을 받은 법률가 한 사람이 꾸민 조서로 말미암아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영국의 국교회를 장악한 로오드는 강력한 장로교를 시행하고 있었던 스코틀랜드에도 자기의 정책을 강요하였습니다. 1637년 그는 영국 국교회의 기도서를 스코틀랜드 교회에서도 읽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반박은 즉각적이고 강력하였습니다. 두 지역은 즉각 전쟁 상태가 되었습니다.

찰스 왕은 스코틀랜드에 성공회를 심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재정난으로 군대를 일으킬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의회를 소집하였습니다. 소집된 의회는 왕의 뜻에 대항해서 왕을 독재 혐의로 기소하였고 로오드를 체포하였습니다. 1642년부터 6년간 의회파와 국왕파는 전쟁을 하였습니다. 국왕을 지원한 이들은 귀족들이었고 의회를 지원한 이들은 그동안 고통을 겪어 온 계층들이었습니다. 

이 와중에 의회는 스코틀랜드와 보조를 같이 하기 위해 감독 제도를 폐지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재산을 압수해서 군자금을 마련했습니다. 그러면서 신앙 문제에 자문을 담당할 수 있도록 신학자들을 소집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은 칼뱅주의 정통 신학의 정신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제 의회와 스코틀랜드는 영국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개혁하기로 협약을 맺었습니다. 

차츰 전투가 시작되자 올리버 크롬웰이 역사의 앞부분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여러 해 전부터 청교도가 되어 열심히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는 국왕의 주력 부대가 기병대임을 알고는 여기에 맞서는 군대를 조직해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기병대를 조직했습니다. 그의 기병대는 숫자는 많지 않았으나 정예의회 군은 왕의 본거지를 점령하였습니다. 그들은 왕이 외국 가톨릭 군대와 손잡은 것을 폭로했습니다. 다급한 찰스는 스코틀랜드인들과 협상을 위해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왕을 사로잡아 의회 군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청교도 군은 의회를 장악하였습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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