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교육만이 쓰러진 민족을 일으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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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교육만이 쓰러진 민족을 일으킬 수 있다”
  • 한현구 기자
  • 승인 2019.05.22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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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기획 - ‘그들이 꿈꾸었던 조국, 우리가 꿈꾸는 대한민국’ ⑪ ‘참 하나님의 사람’ 양전백 목사
▲ 한국 장로교 최초의 목사 7인의 모습. 뒷줄 오른쪽이 양전백 목사다.

“선생은 웅변의 인(人)도 아니요, 문장의 인도 아니며 팔면(八面) 활달한 사교의 인도 아니요, 기책종횡(奇策縱橫)한 지략의 사(士)도 아니다. 다만 강직한 의(義)의 인이며 자애 깊은 정열의 인이다. 비리와 불의 앞에서 추호도 굴치 않는 마음, 빈천과 약자를 보고는 동정의 눈물을 흘리는 마음,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한국 장로교 최초의 목사 7인 중 한 명이자 3.1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격헌(格軒) 양전백 목사(1870~1933)에 대한 사후의 평가다. 양전백 목사는 학교를 설립해 민족이 자립할 수 있는 실력을 기르는 데 온 힘을 쏟았고 한국인으로서 두 번째로 장로교 총회장을 역임하며 민족교회의 지도자로 헌신했다. 

3.1운동 민족대표로 참여하고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는 등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으며 겸손하고 신실하게 크리스천의 사명을 감당했던 인물이었다. 

한국 장로교 최초의 목사

▲ 양전백 목사.

양반 가문의 후예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문을 수학했던 양전백 목사는 1892년 친구의 손에 이끌려 참석한 사경회에서 복음을 접하고 기독교인이 된다.

1907년에는 잘 알려진 대로 한국 장로교 최초의 목사 7인 중 한 사람으로 한석진·길선주·방기창·이기풍·송인서·서경조 목사와 함께 안수를 받는다. 당시 양전백 목사는 안수를 받는 7인 중 가장 나이가 어렸다. 

양전백 목사는 목사 안수를 받기 전부터 민족운동, 특히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에 관심이 높았다. 1901년 양 목사는 초등교육기관으로 명신학교를 설립했고 1905년에는 김석창 목사 등 선천북교회 교인들과 함께 미션스쿨이자 평북지역 중등교육기관의 효시인 신성중학교를 설립하는데 산파역할을 했다. 1907년에는 보성여학교를 설립해 여성들의 교육도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1908년에는 대동고아원을 설립해 불우한 아이들을 돌봤다.

목회자로서의 양전백 목사 역시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빼놓고 얘기하기 힘들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다. 그가 목회했던 평안북도 선천의 선천북교회는 교인 수가 1,400여 명에 달했다. 1916년에는 한국인 중 두 번째로 장로교 총회장을 역임했고 말년인 1927년에는 한국 장로교의 역사를 정리하는 일에도 헌신을 아끼지 않았다. 
 
거짓 자백 후 “목사직 내려놓겠다”
목사 안수를 받은 이후 그의 삶은 수난시대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고난이 계속됐다. 시작은 105인 사건으로 유명한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조작 사건이었다.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과 민족운동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일제가 조작한 이 사건에 양전백 목사를 포함해 이승훈, 양기탁, 윤치호 등 600여 명이 체포됐다. 이들 가운데 122명이 재판에 회부됐고 105명에게 실형이 선고됐다. 

이때 일제는 허위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당시 고문을 받았던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수감자들에게 가해진 고문방법은 무려 70여 가지에 이르렀다. 결국 모진 고문에 못 이겨 몇몇 이들은 허위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고 양전백 목사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양전백 목사는 구속 이후 1년 6개월 만인 1913년 무죄로 석방됐다. 교회로 돌아간 것은 햇수로 3년 만이었다. 이때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고 머리털과 수염까지 뽑힌 비참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는 눈물로 그를 맞이한 교인들에게 폭탄선언을 했다. 

“나는 이제 교직(목사직)을 사하여야 되겠습니다. 연약한 육신을 가진 나는 재감 중 통초(아픔과 괴로움)를 이기지 못해 하지 않은 일을 하였다고 거짓말을 하였으니 주의 교단에 설 수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고문을 이기지 못해 거짓을 말했으니 목사를 할 자격이 없다는 실로 진솔하고 순수한 고백이었다. 그러자 교인들은 “목사님 같이 양심적인 분은 없다”며 울면서 사임을 만류했다. 양전백 목사가 어떤 신앙을 갖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심으로 민족 사랑했던 기독교 지도자
그런 고초를 겪고 난 후에도 양전백 목사의 민족을 향한 사랑과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참여하면서 관서지방 총책 역할을 도맡아했다. 3.1운동 이후 일제에 체포된 이후에도 “좋은 기회만 있다면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당당히 밝혔다. 

민족대표 중 한 명으로 또 한 번의 옥고를 치른 뒤 양전백 목사는 목회와 교육 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3.1운동 이후 폐허가 됐던 명신학교의 교사를 신축하는 등 재건에 온 힘을 쏟았고 재단법인을 설립해 학교 정원을 475명까지 늘렸다. 좌우합작 민족운동 단체였던 신간회의 선천지회가 창립되자 간사로 뽑혀 활동하며 민족운동의 끈을 놓지 않았다. 1924년에는 대동고아원과 함께 선천 유치원을 설립해 민족의 미래인 아이들을 키웠다. 

양전백 목사는 1933년 고문 후유증과 오랜 지병으로 투병 끝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장례식은 당시 총회장 남궁억 목사의 사회로 기독교연합사회장으로 거행됐다. 당시 장례식에는 기독교 관계자는 물론 민족지도자와 교육운동가 등 5천여 명이 몰려 양 목사의 마지막 길을 함께 했다. 

한국기독교3.1운동백주년기념위원회 대표 윤경로 교수는 “양전백 목사는 목회자로서든 교육자로서든 그가 하는 메시지에는 항상 민족사랑과 애국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양 목사의 활동은 오늘날과 같이 교세를 확보한다거나 개인의 인기를 영합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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