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영원한 자유 위해 전 재산을 내어 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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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영원한 자유 위해 전 재산을 내어 놓다”
  • 한현구 기자
  • 승인 2019.04.24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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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 8//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 우당 이회영

조선 4대 부자로 꼽힌 가문, 만주에서 독립운동 투신

“독립을 위한 겸손한 희생, 신앙인이었기에 가능했다”

 

“이루고 못 이루고는 하늘에 맡기고 사명과 의무를 다하려다가 죽는 것이 얼마나 떳떳하고 가치 있는가.”

14세기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있었던 백년전쟁 당시 칼레 도시를 지키기 위해 시민 지도자 6명이 자진해서 목숨을 내놓았다는 일화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적인 예로 꼽힌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그에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 큰 희생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한 인물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우당 이회영 선생(1867~1932)과 그의 형제들이다.

가문의 엄청난 부를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내려놓고 차디찬 간도에서 오직 조국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이회영 선생. 그는 썩어 없어질 재물과는 비교할 수 없이 귀한 가치가 있음을 알았던 크리스천이었다.

 

▲ 우당 이회영 선생.

전 재산 팔아 일가족이 독립운동 투신

이회영 선생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요즘말로 금수저라 불렸을 법 하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이 그의 10대조였으며 그 후로 9대조를 제외하고 가문 모두가 정승, 판서, 참판을 지낸 나라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였다.

본래 상당한 영향력을 소유한 명문가에다 재산도 어마어마했기에 민족의 아픔에 고개를 돌리고 눈만 질끈 감고 있었더라면 호의호식하며 권세를 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회영 선생은 양심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았다. 선생의 7형제 중 6명과 일가 50여 명은 경술국치를 전후로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넘어갔고 일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당시 이회영 선생의 집안이 독립운동을 위해 급하게 처분하고 간 재산은 약 40만원 상당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현 시세로 환산하면 650억 원에 이르고 당시 시세로 소 13,000마리를 살 수 있었던 거금이었다. 게다가 급하게 떠나느라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남기고 간 자산도 있었다고 하니 집안의 부가 얼마나 엄청났는지 짐작할 수 있다.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후부터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 엄청난 재산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학교를 세우느라 8년 만에 바닥을 드러냈다. 선생의 아들인 독립운동가 이규창 선생이 자서전에서 “일주일에 세 번 밥을 지으면 운수가 대통”했다고 표현할 정도로 뼈저리게 가난한 삶이었다.

50여 명의 대가족이 대한독립이라는 대의를 품고 만주로 떠났지만 해방 후 조국 땅을 다시 밟았을 때 살아남은 가족은 20여 명에 불과했다. 해외 독립운동이 얼마나 힘들고 험난한 길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회영 선생과 함께 만주로 건너갔던 6형제 중 살아서 광복의 기쁨을 마주한 이는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선생밖에 없었다.

▲ 이회영 선생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주축이 됐던 한국광복군의 모습.

선각자 정신으로 무장독립운동 펼치다

젊어서부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회영 선생은 실로 선각자라 불릴만한 사람이었다. 선생은 스무 살이 지나면서부터 집안의 노비에게도 존대했고 자신이 앞장서 평민으로 풀어주기까지 했다. 새로운 제도와 사상에 언제나 열려있었고 배운 것은 즉각 행동에 옮겼다. 50여 명 대가족의 만주 망명 역시 선생의 주도로 이뤄졌다.

특히 과부가 된 누이동생을 재혼시킨 일화는 선생의 앞선 사상을 잘 보여준다. 당시 남존여비의 엄격한 유교사회에서 과부의 재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선생은 남편을 잃은 누이동생을 시댁에서 몰래 데리고 온 뒤 급환으로 죽었다고 거짓 부고를 냈다. 그런 뒤 거짓 장사까지 치르고는 새 혼처를 찾아 재혼을 시켰다.

만주로 넘어가기 이전에도 선생은 활발하게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898년에는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민중계몽 운동을 벌였고 안창호 선생, 전덕기 목사와 함께 비밀결사단체 신민회의 주축으로 활동했다. 이상설 선생, 이동녕 선생을 통해 서전서숙 설립을 돕고 상동교회의 상동 청년학원 개설에도 함께하는 등 민족 교육에도 땀을 흘렸다.

만주로 넘어간 이후 선생은 주로 무정부주의에 근거해 무장독립운동 활동을 펼쳤다. 재 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항일구국연맹 등을 조직하고 한반도와 중국, 일본을 넘나들며 독립의지를 알릴 의거를 계획하고 실행했다. 청산리 전투의 주역들을 배출했던 신흥무관학교도 선생이 만주에 남긴 흔적이었다.

 

겸손하고 진실 되게 충성했던 크리스천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적 인물로 기억되는 이회영 선생의 기독교 신앙은 그의 독립운동 활동들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선생은 유력가문의 양반자제였음에도 남들의 시선을 아랑곳 않고 남대문시장 상인들이 다니던 상동교회를 다녔다. 그곳에서 복음을 듣고 회심한 후 65세에 일경의 모진 고문으로 눈을 감기까지 크리스천으로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살았다. 그는 평생을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고 영향력도 상당했음에도 어떤 단체나 모임에서 장을 맡은 일이 없을 정도로 겸손했다.

선생은 상동청년회와 함께 민족정신을 품은 기독교 인재를 길러내기 위한 상동청년학원 학감(교감)을 맡았고 상동교회 담임이었던 전덕기 목사와 함께 상동파로 불리며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단체 신민회의 창립 역시 이회영 선생이 속한 상동파와 크리스천들이 중심이었다.

감신대 이덕주 교수는 “권사 직분을 갖고 상동교회에 다닌 우당 이회영 선생은 아래로부터의 민족운동을 실천했던 사람”이라며 “그가 명문가 출신 양반이면서도 엘리트 의식을 갖고 낮은 자리에서 서민들을 섬기며 민족을 위해 희생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 신앙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회영 선생이 신앙을 키웠던 상동교회의 담임 서철 목사는 “이회영 선생은 상동교회에서 상동파를 형성하고 대한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항일무장투쟁의 전위대이자 자유정신의 아나키스트셨다”며 “세상의 재물과 명예를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더 가치있는 것에 목숨을 걸었던 우당 선생 같은 신앙인 한 사람만 있으면 대한민국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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