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의 중용적 종교개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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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의 중용적 종교개혁(1)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9.04.23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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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영국의 종교개혁(11)

25세의 나이에 여왕이 된 엘리자베스(재위 1558~1603)는 영국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왕이라는 평가를 받는 여성입니다. 그는 메리의 이복동생으로서 메리에게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영국 국민은 메리와 필립 사이에 무자식이었던 것을 큰 다행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엘리자베스는 45년간의 장기통치를 통하여 영국의 정치를 안정시키고 강력한 해군을 보유하고 더 나아가서는 식민지를 많이 확보하여 경제부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성공회를 영국 국교로 확립했는데 이 모든 과정에서 그녀가 발휘한 통치력은 실로 위대하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영국 전체는 완전한 개신교의 나라가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바랐던 것은 영국을 복지국가로 만들고 정치적, 종교적으로 양분되어 있던 나라의 분열을 치유하고 통일을 이룩해내는 것이었습니다. 로마교황청은 엘리자베스가 헨리 8세의 불륜에서 태어났으므로 합법적인 여왕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관계 회복을 바랐습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부친 헨리 8세의 생각처럼 영국을 독립된 강력한 왕권국가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교황청과 신성로마제국과의 관계 회복을 원치 않았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앤 볼린의 딸로서 개신교도였음에 틀림없습니다. 메리 치하에서 그녀는 개신교도란 이유 때문에 고통을 당했고, 그녀는 커가는 개신교에 의해 환호를 받았으며, 망명자들은 대륙으로부터 서둘러 돌아왔습니다. 

그녀의 정치적 이상은 영국을 주변 국가의 위협과 침입으로부터 막아내고 단시일 내에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정치적 이상과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해서는 민족의 총체적 통일과 단합을 도모하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현실문제 때문에 그녀의 종교정책은 중간노선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존 낙스는 그녀에 대해서 평하기를 “확실히 교황주의자는 아니지만 훌륭한 개신교도도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엘리자베스는 여러 번의 반대를 물리치고서 1559년 4월 29일 헨리 8세에 이어 두 번째 수장령을 선포하여 그녀가 국가의 최고 책임자임을 선언하였습니다.

영국 의회는 엘리자베스의 정책을 수용하여 수장령을 통과시키면서, “영적이나 세상적인 모든 외국의 침략적 권세와 권위가 이 나라 모든 영역에서 영원히 종식되고 … 무력화 시키는 것이 폐하의 뜻”이라고 선언하였고, 어떤 사람도 국왕의 뜻에 반하는 법률, 법령, 관습, 제도를 주장할 수 없도록 조처하였습니다. 종교적 결정은 왕권에 위임하도록 하였고, 교직자나 왕의 녹을 받는 행정 관료는 그들의 신분 위엄, 권세에 상관없이 성경에 손을 얹고 다음과 같이 서약하도록 하였습니다.

“나는 양심을 걸고, 여왕 폐하가 영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또는 세상적으로 볼 때 이 나라의 유일한 통치자임을 서약합니다. 따라서 외국의 군주, 성직자, 권력자, 또는 외세가 이 땅에서 교회적으로나, 영적으로 지배권, 권력, 통치권, 통솔력을 행사할 수 없으며, 모든 외국의 지배권, 권력, 통솔권 등을 부인하며, 그들에 충성하지 않으며, 이후로는 여왕과 그 후손과 합법적인 승계자에게만 진정한 충성을 바칠 것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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