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여왕 메리의 반 개혁운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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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여왕 메리의 반 개혁운동(2)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9.04.16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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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영국의 종교개혁(10)

또 훌륭한 개혁가였던 토마스 크랜머 역시 1553년 반역죄로 투옥되었습니다. 정부는 그를 바로 처형하지 않았습니다. 공식적으로 자신의 신앙오류를 자인하게 함으로써 가톨릭의 우위를 선전하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3년이 넘는 감옥생활로 쇠약해진 그는 회유와 협박에 못이겨 결국 자신의 신앙을 철회하였습니다. 회유를 견디지 못해서 압제자의 요구에 서명하고 취소하기를 일곱 번이나 거듭하다가 결국 1556년 3월에 화형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1556년 3월 21일 토요일 아침, 옥스퍼드의 브로드 스트리트에 장작이 쌓여졌습니다. 모여든 군중들에게 설교가 행해졌는데, 궂은 날씨였기 때문에 만장한 대학의 교회당 안에서 설교가 행해졌습니다. 거기에 작은 단이 세워지고 그 위에 크랜머 대주교가 올라섰습니다. 

설교가 끝난 뒤에 그는 청중들에게 자기가 ‘거룩한 어머니 교회’(즉 가톨릭교회)로 전향한 사실을 공표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자기의 옛 신앙을 반복·재확인하는 선언을 했으며, 자기의 손이 자기 중심의 뜻과는 달리 잘못된 사실을 서명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내 손이 맨 먼저 벌을 받아야 할 것이므로 나의 손부터 태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교황에 대해서는 “그의 모든 거짓 교리와 더불어 적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원수”라고 단언하였습니다. 사제들은 “저 이단의 입을 막아라”고 소리쳤습니다. 주변의 구경꾼들도 그가 틀림없이 미쳤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그곳 교회로부터 뛰어나와서 이미 맹세했던 대로 오른손부터 불 가운데 집어넣었습니다.

또한 후퍼는 복장으로 신도와 성직자를 구별하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의 사상과도 배치되는 것이요, ‘적그리스도의 복장’이라고 비난한 일로 인하여, 1553년 로마 천주교 신앙을 따르던 메리 여왕의 등극과 함께 투옥되었고, 1555년 2월 9일 이단으로 정죄되어 화형에 처하여졌습니다. 

메리는 영국인과 결혼하라는 국회의 권고를 무시하고 1554년 7월 20일에 스페인의 자기 사촌 필립과 결혼하였습니다. 필립은 장차 카를 5세를 이어서 스페인의 왕이 될 사람이었습니다. 이때 메리의 나이는 38살, 필립의 나이는 27살이었습니다.

1556년에 필립은 본국으로 귀국하여 필립 2세로서 국왕의 자리에 올랐으며, 1년 반 후에 런던으로 돌아왔지만, 겨우 3개월만 머무르고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결국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스페인 간 전쟁에 휘말려 프랑스에 패하여 대륙에 가지고 있던 마지막 영토인 칼레를 영원히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필립 2세와 결혼한 뒤, 메리는 아이를 간곡히 바랐지만 모두 상상임신이었으며, 메리와 필립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1554년 말 잉글랜드는 교황에 대한 충성을 다시 서약하였습니다. 헨리와 에드워드 시대에 내려졌던 여러 가지 조치들이 대부분 철회되었습니다. 결혼한 성직자들은 아내들을 내보내야 했습니다. 성자들을 위한 여러 축일들도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개신교도들이 해외로 도피했는지 모릅니다.

무서운 공포 정치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메리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메리 1세는 5년 남짓한 재위한 뒤, 난소 종양에 걸려 1558년 11월 17일에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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