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여왕 메리의 반 개혁운동(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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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여왕 메리의 반 개혁운동(1)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9.04.09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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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영국의 종교개혁(9)

1553년 에드워드가 죽자 캐더린에게서 난 37세의 처녀 메리가 왕위에 오름으로써 에드워드 시대의 개혁은 끝이 났습니다. 메리는 영국을 자기 어머니의 종교로 되돌려 놓으려고 굳게 다짐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메리 1세는 아버지 헨리 8세의 외동딸이었습니다. 메리 1세는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더린 사이가 틀어질 때까지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헨리 8세는 메리 1세에게 영국 왕족 중 처음으로 웨일스의 여공작 칭호를 내렸고 처음으로 독립된 궁정을 두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헨리 8세는 왕가의 존속을 위하여 간절히 아들이 탄생하기를 바랐습니다. 헨리 8세가 아라곤의 캐더린과 이혼하고 앤 볼린과 재혼해 새 왕비가 된 앤은 메리의 공주 자격을 박탈하였습니다. 이복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태어나자 앤 볼린은 메리의 왕위 계승권을 빼앗아 서녀로 취급하도록 했습니다. 다행히 헨리 8세의 여섯 번째 왕비인 캐더린 파아에 의해 간신히 공주의 신분이 복권되었습니다.

이복동생 에드워드 6세의 치하에서 가톨릭 신앙과 통일령 및 신기도서의 거부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복동생 에드워드 6세가 1553년에 16살의 어린 나이에 요절하자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가 자기 아들과 결혼시킨 제인 그레이를 새로운 군주로 옹립하지만, 이에 반발하여 귀족들과 국민들이 봉기를 일으켰으며 이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메리가 오게 되면서 실패하게 됩니다. 메리는 스스로 여왕으로의 즉위를 선언하였으며, 노섬벌랜드 공작은 9일 후에 구속되어 대역죄인으로 처형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메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가톨릭교회가 박해를 받은 것과 자기 모친의 비운에 대한 원한을 가지고 헨리 8세의 장녀 자격으로 영국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메리 여왕은 ‘수장령’을 국회에서 통과시켜 자신이 영국의 정치적 및 종교적 수장임을 선포하고 영국 내 가톨릭의 재건과 회복을 꾀하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캔터베리의 대주교 레지날드 폴이 로마 교황청의 대사가 되어 영국에 주재했고 에드워드 6세 때 임명되었던 교회 감독들이 다 파면됐습니다. 그리고 헨리 8세 말기에 사용하였던 예배지침서가 회복되었고 가톨릭 미사 예식이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헨리 8세가 단절했던 교황청과의 관계도 회복시켰습니다.

그녀는 1553년, 37세 때 등극하여 불과 5년 동안 통치하고 사망하였으나 그 짧은 기간에 에드워드 6세가 이룩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완전히 전복시켰고 그녀가 이단자로 정죄한 300명이 피를 흘려 ‘피의 여왕’이라는 오명을 남겼습니다.

설교 시간에 교황제도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한 존 로저스는 메리 여왕에 의해 최초의 순교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후 예배 때 ‘아론 조끼’(로마 가톨릭 제의)를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당한 존 후퍼, 휴 라티머 등 저명한 지도자들이 투옥되고 죽음을 당하였으며, 약 300명가량의 목회자들이 1555년 2월에 옥스퍼드에서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불길이 이들을 덮치기 시작할 때에 라티머 주교는 리들리 주교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위로를 하였습니다. “리들리 경, 담대하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시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은혜로 영국에서 결코 꺼지지 않을 양초가 되어 불타게 될 것입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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