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잔 다르크 ‘유관순’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상태바
한국의 잔 다르크 ‘유관순’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 이인창 기자
  • 승인 2019.04.03 10: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백석대 유관순연구소, 3.1운동 100주년 국제심포지엄
▲ 백석대 유관순연구소가 주최한 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 학자들이 유관순의 삶과 각국 여성영웅들의 생애를 조명했다.

1919년 만 17세 나이에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이듬해 구국의 절개를 지키다 순국한 유관순 열사를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또 100년 이후 후손들에게 무엇을 남겨야 할까. 

백석대학교 유관순연구소와 천안시가 지난 1~2일 개최한 3.1운동 100주년기념 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 다각적 차원에서 유관순 열사의 생애와 애국정신이 집중 조명했다. 특히 국내외 석학들은 국제적 차원에서 3.1운동과 유관순 열사의 독립운동을 심도 깊게 살펴보고 이를 후대가 어떻게 기념해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해방 이후 조명된 유관순 열사의 생애
유관순이 우리 민족에게 알려진 것은 그가 사망한 직후가 아니라 25년이 지난 해방 이후였다. 그 사이에는 거의 잊힌 인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유관순의 삶과 애국은 소설가 박계주에 의해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 재학 중 1919년 3.1만세운동에 가담했다가 고향 천안 아우내(병천)에 내려가 다시 한 번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당시 고향교회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준비되고 있었고, 직접 만세운동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유관순의 영향을 받아 본격적으로 시위가 촉발된 것으로 보인다. 

4월 1일 시작된 아우내 만세시위 당시 유관순의 부모가 현장에서 사망하고 결국 그 역시 체포되고 말았다. 유관순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학생 71명 가운데 가장 많은 징역 3년의 형량을 받아야 했다. 당시 보안법 적용 최고형량은 징역 2년이었지만 유관순만 보안법과 형법상 소요죄가 함께 적용된 것이다.

유관순은 1920년 3.1운동 1주년을 맞아 옥중시위를 전개하기도 했다. 더욱 갖은 고초를 겪게 됐고 결국 1920년 9월 28일 석방을 불과 이틀을 앞두고 사망하고 말았다. 이러한 생애가 제대로 조명되기까지 긴 세월이 흘렀다. 

잊힐 뻔한 유관순, 소설가 박계주에 의해 알려져
“영광스런 삶을 살았던 비폭력저항 운동의 상징”

조한필 부위원장(천안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은 “1947년 2월 28일 경향신문 3.1운동 특집지면에서 박계주가 쓴 ‘순국의 처녀’가 소개되면서 유관순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며 “그것을 계기로 유관순 기념사업회가 결성됐고 영화와 전기가 만들어지면서 3.1운동의 상징이 됐다”고 설명했다. 

조 부위원장은 “해방 후 정치 사회적 상황이 프랑스 잔 다르크와 같은 영웅을 바라던 때여서 일부 과장된 측면도 있었고 일부 친일인사들이 자신들의 과오를 덮기 위해 앞장서 유관순을 내세운 측면도 있었다”면서 “최근 10여년 동안 관련 학자와 향토사학자의 노력으로 거품을 걷어내는 성과를 거두며 유관순 열사가 바르게 조명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유관순에 대한 역사적 실체를 밝히는 데 백석대 유관순연구소가 전개해온 지난 20년의 역할도 매우 컸다. 열사의 가족과 지인, 동창 등에 대한 증언을 수집하고 재판기록과 족보, 언론보도 등을 바탕으로 유관순의 삶을 복원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유관순연구소와 오랫동안 열사에 대한 역사규명 작업을 진행해온 천안지역 향토사학자 임명순 씨는 해방 이후 여성단체들이 더욱 유관순 열사의 삶에 주목했던 점을 언급했다. 

임명순 씨는 “여성단체들이 독립투쟁에서 여성들의 업적도 있다는 것을 강조할 수 있는 인물이 유관순 열사였다”며 “어린 여학생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끝까지 투쟁하는 모습과 순국까지 했던 역사가 과거 봉건적 악습을 답습하는 여성들을 각성시킬 수 있다고 봤다”고 주장했다. 

세계 여성영웅과 닮은 유관순의 삶
국제심포지엄에서는 프랑스와 알제리, 일본, 중국 학자들이 유관순 열사와 같이 해외 각 나라의 독립운동을 했던 투사들의 모습을 조명했다. 그 안에서 우리나라가 유관순 열사를 기억할 수 있는 방안들을 모색할 수 있을 듯 했다. 

특히 프랑스의 여성영웅 잔 다르크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 올리비에 부지(Olivier Bouzy) 잔 다르크 연구소 학술연구원장은 “수많은 여성 전쟁영웅 중 잔 다르크가 역사적 상징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영웅이자 멋진 패배자와 같은 이중적 요소 때문이며 극적인 삶 속에서 어린나이에 사망한 것도 이유”라고 분석했다. 

부지 교수는 잔 다르크의 극적인 애국적 투쟁의 삶은 유관순 열사의 그것과도 유사하다고 봤다. 차이가 있다면 잔 다르크는 생전에 영웅이 되었다면 유관순은 사망 이후 많은 시간이 걸렸다는 점이다. 

충북대학교 라정일 교수는 “잔 다르크를 기억할 수 있는 요소를 통해 유관순 열사를 조명한다면 그 역시 짧지만 영광스런 인생을 선택한 ‘젊은 영웅’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서 “이제 유관순 열사의 삶을 통해 새로운 상징은 물론 다른 여성운동가들을 재조명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본 나이토 미츠히로 센슈대학 교수는 “평화적으로 한국 독립을 외치다 죽어간 유관순은 비폭력 저항운동의 상징이라고 부를만한 생애를 살았다”며 “패전 후 일본 헌법에 명시된 ‘평화적 생존권’과 ‘국제협조주의’, ‘비군사적 평화주의’은 대한민국 헌법에서 계승하고 있는 3.1운동의 정신, 3.1운동의 기반이 된 ‘조선독립선언문’에 기반을 둔 것이라 할 수 있다”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한일장신대학교 신의연 교수는 중근 근대사에서 가장 먼저 민주혁명과 여성해방을 위해 헌신했던 여성인물 추근(秋瑾)의 삶을 살펴보면서 “유관순과 추근은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지 안 되는 여성이었으며, 그러한 열정과 신념이 구습을 쉽게 넘어설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고 전했다. 

알제리대학교 모스테파 키아티(Mostefa Khiati) 교수가 프랑스로부터 알제리가 독립하는 당시 여성들의 역할을 유관순 열사의 생애와 함께 조명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