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폐한 땅 우간다에 희망의 씨앗을 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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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폐한 땅 우간다에 희망의 씨앗을 심습니다”
  • 한현구 기자
  • 승인 2019.04.03 09: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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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선교를 향해 뛴다//우간다 최광식 선교사

교회와는 어울리지 않던 사업가, 모든 것 내려놓고 아프리카 떠나다

농장으로 성공적 비즈니스 선교 모델 구축…“선한 영향력 발하길”

 

마냥 척박하기만 할 것 같은 땅 아프리카 우간다에 희망의 꽃을 심는 이들이 있다. 한때 잘나가던 사업가였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프리카를 위해 헌신했다. 2014년부터 우간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있는 최광식(57) 김오순(57) 선교사 부부다.

최 선교사 부부가 우간다에 도착한 지는 불과 5년 전. 하지만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우간다는 놀랍게 변화됐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방치돼 있던 대지는 지역 주민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농장으로 탈바꿈했고 황폐한 땅엔 꽃이 피어났다. 그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의 씨앗이 심겨져 날로 자라고 있음은 물론이다. 우간다에 희망을 심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세상의 성공을 내려놓고 아프리카로 떠난 최광식 선교사. 그는 우간다에서 성공적인 비즈니스 선교 모델을 정착시키고 있다.

연매출 천 억 회사 내려놓고 선교지로

최광식 선교사는 원래 선교라곤 생각도 않던 사람이었다. 아니 애당초 교회와 거리가 멀었다. 연매출 1,000억이 넘는 회사를 운영하며 술과 담배를 입에 달고 살던 그였다. 방송에도 출연할 정도로 남부럽지 않은 성공을 이뤘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2006년 아내의 권유로 무슨 얘기 하는지 들어나 보자며 갔던 교회가 그의 인생을 180도 뒤집었다.

구원의 감격을 경험한 이상 이전과 같은 삶은 상상할 수 없었다. 없으면 못살 것 같던 술, 담배도 한 방에 끊고는 잘나가던 회사를 정리하고 신학교에 입학했다. 처음엔 막연히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는 목회자가 돼야겠단 생각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다른 곳에 있었다. 신학교 졸업을 한 학기 남겨뒀던 시기, 하나님은 그를 우간다 선교사와 만나게 하셨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죠. 거리도 한국과 어마어마하게 떨어져 있는데다 환경도 너무나 다른 곳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일단 가족들과 함께 21일 탐방을 해보고 결정하기로 맘먹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전 가족들 모르게 ‘탐방이 끝나고 가족들이 모두 우간다에 오겠다고 말하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겠습니다’라고 혼자 기도했죠.”

가장 마음에 걸렸던 건 앞날이 창창한 20대 중반의 아들이었다. 한국의 친구들과 즐거운 청춘, 앞으로의 비전까지. 아들에겐 아프리카에 오면 포기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탐방 일정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기 전 조심스럽게 아들에게 물었다. “아들아 우간다를 어떻게 생각하니.” 아들의 대답은 단호했다. “아버지, 바로 오겠습니다.” 너무도 확고한 응답이었다. 아내도 우간다 상황을 보더니 할 일이 많겠다고 말했다.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사업가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사업가에서 선교사로 직함이 달라졌지만 달란트는 숨길 수 없었다. 처음 탐방에서부터 우간다의 따뜻한 기후가 눈에 들어왔다. 우간다에서는 아직도 대부분이 1차 산업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농업은 현지인들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선교를 위해 농업을 시작하면 제격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간다 나카우카 지역에 자리를 잡은 최광식 선교사는 한국에서부터 비닐하우스 자재를 직접 공수해 황무지를 다지고 기반을 만들었다. 그도 한국에서 농사를 지었던 건 아니었기에 일단 몸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열심히 배워왔던 농업 지식도 토양과 기후가 다른 우간다 땅에선 소용없을 때가 많았다.

적응이 힘든 것은 토양과 기후뿐만이 아니었다. 그를 더 힘들게 한 것은 오히려 땅보다는 사람이었다. 우간다에서 도둑질과 거짓말은 죄라고 보지도 않는 듯 느껴졌다. 농업용수로도 쓰고 현지인들에게도 제공할 겸 우물을 파놓으면 그 다음날 워터펌프가 사라지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심지어 지역 경찰들은 외국인인 최 선교사의 물건을 훔치는 것을 보고 ‘잘했다, 나눠먹자’고 할 정도였다. 나카우카 주민 대부분이 무슬림인 것도 넘어야 할 산 중 하나였다.

“믿음으로 순종하고 선교사로 갔지만 막상 위기가 눈앞에 닥치자 사업가적인 생각으로 해결하려는 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인간적인 인내심에도 한계가 왔죠. 그러다 1년 반 만에 사기를 당하고 돈을 다 날리니 눈이 번쩍 뜨이더군요. 종의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 고백하고 엎드렸죠.”

돌파구는 오직 기도에 있었다. 기도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니 무슬림 주민들과의 관계가 바뀌기 시작했다. 답이 보이지 않던 행정적인 어려움도 차차 해결돼 나갔다. 최 선교사는 응답받은 기도가 너무 많아서 세는 것조차 힘들다고 고백한다.

“우간다에는 3개월 정도 비가 오지 않는 건기가 있습니다. 한 번은 우간다에 간지 얼마 안 되어 건기가 뭔지도 잘 모를 때였어요. 사람들이 하도 뜨겁다고 덥다고 힘들어하자 제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비를 주신다고 했죠. 현지인들이 건기에는 비가 절대 안온다고 비웃더군요.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비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때서야 주민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두려워하고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죠.”

▲ 직원들과 함께 농장을 일구는 최광식 선교사.

식민 지배의 아픔 딛고 하나님 나라로

최광식 선교사가 세운 다육이 농장은 이제 세계적인 업체로 성장했다. 농장에서 생산된 상품은 유럽 전역과 북미 지역에까지 수출된다. 단순히 최 선교사 가정이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이 생긴 것이 전부가 아니다. 농장엔 현지인들을 채용해 그들이 생계를 꾸려가도록 돕고 매일 아침 예배를 드리며 복음을 전한다. 선교사로의 사명과 사업가 시절의 경험이 만나 훌륭한 비즈니스 선교 모델이 탄생한 것이다.

무슬림이 대부분인 나카우카 지역이지만 최 선교사가 목회하는 나카우카명성교회에는 130명이 넘는 현지인들이 출석한다. 농장 직원은 물론이고 농장에 나오지 않는 주변 이웃들도 교회에 발을 딛기 시작했다. 교회에선 부활절과 크리스마스가 되면 주민들에게 선물을 나누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학비도 지원한다. 최근엔 백석대의 제3세계 학생 지원 프로그램과 연계해 청년 한 명을 한국에 유학도 보냈다.

“처음에 농장을 준비할 땐 ‘사업이면 사업이고 선교면 선교지 그게 뭐냐’는 반응을 많이 접했어요. 그래도 이젠 비즈니스 선교라는 개념이 많이 자리를 잡았죠. 비즈니스 선교는 단순히 선교사들이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현지 사회에 이방인이 아닌 한 사람의 이웃으로 녹아들고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죠. 우리 농장을 통해 자연스레 우간다에 복음이 흘러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영국에 식민 지배를 당한 경험이 있는 우간다인들에겐 ‘주인이 누구냐’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때의 문화가 아직도 남아 관리자는 일을 절대 하지 않고 노동자만 일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최광식 선교사가 우간다에 처음 와서 직접 토지를 일구자 현지인들이 궁금해 한 것도 ‘주인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최 선교사는 ‘내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답한다. 이 땅에 식민지배의 상처가 걷히고 거짓과 속임이 사라져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 그의 가장 큰 기도제목이다.

“이곳엔 학비철만 되면 도둑질이 횡행합니다. 표면적으론 크리스천의 비율이 높지만 속으론 부패와 부도덕이 만연해있죠. 복음을 통해, 그리고 농장 사역을 통해 잠깐 눈앞의 삶이 나아지는 것을 넘어 이들의 문화가 달라지고 말씀으로 바로 서게 되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행하는 크리스천들이 세워지고 건강한 교회가 세워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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