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8세의 정치적 종교개혁(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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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의 정치적 종교개혁(4)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9.03.13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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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 영국의 종교개혁(6)

그런데 헨리 8세는 앤과 잘 지내다가 앤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을 낳자 다시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앤 볼린도 딸만 하나 낳았기에 캐더린보다 나은 입장이 못 되었습니다. 1536년 캐더린이 죽은 해에 앤 볼린은 간통 혐의로 참수를 당하였습니다. 

그 후 앤 볼린의 시녀 제인 세이모어가 왕비가 됩니다. 그러나 허약한 체질이었던 제인은 1537년 출산 때 무려 사흘이나 걸려서 아들 에드워드 6세를 낳았습니다. 헨리 8세는 아들의 탄생에 크게 기뻐하여 울먹였고, 런던탑에서는 2,000여 발의 축포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제인은 출산 후 산욕열로 2주 만에 사망했는데 헨리 8세는 왕자를 낳아준 제인 세이모어를 특별하게 여겼고, 사후에 제인 곁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헨리 8세는 1539년 네 번째 신부로 앤을 맞아들입니다. 크롬웰이 클리브즈의 두 딸 중 앤의 초상화를 그려다가 헨리 8세에게 보여주며 중매를 주선하고 이 공로로 ‘에식스의 백작’ 칭호를 받습니다. 

그러나 초상화와 실물이 다른 사실을 안 헨리 8세는 잠자리도 하지 않았고 이 사실을 안 의회 역시 이 결혼을 무효화 시켰습니다. 속았다는 사실을 안 헨리 8세도 화가 났지만 크롬웰의 정적들은 헨리를 부추겼습니다. 결국 크롬웰은 1540년 7월 28일 타워그린에서 비공개 처형을 당했습니다.

이렇게 헨리 8세는 클리브즈의 앤과도 이혼하고 두 번째 아내인 앤 볼린의 사촌이자 클리브즈의 앤의 시녀인 캐더린 하워드와 결혼하였으나 결혼 전부터 여러 남자를 사귀었던 그녀는 결혼 후에도 토머스 켈페퍼 경과 눈이 맞았습니다. 크랜머는 이 사실을 헨리 8세에게 알렸고 화가 난 헨리는 켈페퍼를 런던탑에 가두고 고문을 가한 후 참수형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캐더린 하워드도 다시 간통 혐의로 처형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헨리 8세의 여섯 번째 아내이자 마지막 아내는 프로테스탄트인 캐더린 파르(약 1512~1548)였습니다. 파르는 두 번이나 남편과 사별한 미망인이었지만 헨리의 아내들 중 가장 지성을 갖춘 여인이며 신학에도 열정적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나이 많고 병으로 고생하는 헨리 8세를 잘 섬겼습니다. 이렇게 헨리는 파르와 1543년 결혼하여 5년을 더 살고 1547년 1월 28일 힘든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임종을 지켜본 대주교 크랜머는 헨리 8세의 행위에 반대하고 간섭한 적이 많았지만 헨리 8세는 그를 신임하고 그의 적수들을 물리치고 그를 보호하여 주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원저 캐슬에 있는 조지 채플에 제인 세이모어와 함께 나란히 묻혔습니다.

마지막 아내였던 캐더린 파르는 1547년 헨리 8세가 임종을 하자마자 결혼전 사랑하던 제인 세이모어의 오빠 토머스 세이모어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헨리 8세의 여성 편력은 참으로 대단하였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그의 여성 편력의 배경에는 사실 아들을 후계자로 삼아 튜더 왕가를 굳건하게 세우고자 하는 강한 의중도 실려 있었습니다. 1500년대 당시 사람들도 여성이 왕위 계승자가 되면 그 권력이 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세력권 아래 복속되리라고 우려하였던 것입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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