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적 아픔에 대한 침묵도 죄, 바른 신앙이 나라 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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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적 아픔에 대한 침묵도 죄, 바른 신앙이 나라 구해”
  • 정하라 기자
  • 승인 2019.03.12 17: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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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그들이 꿈꾸었던 조국, 우리가 꿈꾸는 대한민국’

③‘기독교 구국론’으로 독립운동 나선 은재 신석구 목사

현실 도피적 신앙 경계해야
이 땅의 선교적 과제…통일
복음만이 나라 살릴 수 있어

“민족에게 주신 주권을 지키지 못하고, 일제에게 빼앗긴 자체가 역사적인 죄이며, 그것을 찾을만한 기회에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도 죄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올해 일제강점기 나라를 빼앗긴 설움의 그날,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 본다면 민족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할 신앙인이 얼마나 될까. 여전히 민족사적 과제에 둔감한 그리스도인이 많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위협에도 “교회는 신앙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바른 신앙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기독교구국론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나선 신앙인들이 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에서도 일제시대를 거치며 광복을 앞두고 변절한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채 광복을 맞이한 은재(殷哉) 신석구 목사가 바로 그다. 그는 감리교 목사로 해방이 될 때까지 신사참배를 거부와 일장기 게양 거부, 태평양전쟁 전승기원 예배 거부 등으로 수차례 투옥됐으며, 해방 후에도 반공노선을 견지하다가 순교했다.

▲ "나라를 잃은 것에 침묵하는 것도 죄"라고 말한 신석구 목사는 기독교구국론을 바탕으로 3.1운동 민족대표로 참여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하나님사랑·민족사랑’의 소명으로

신석구 목사의 삶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1907년 기독교를 믿기로 결신한 이전과 이후의 삶으로 기독교를 믿기 전 그는 전통적인 유교 신봉자로서 우리 민족사에는 거의 무관심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1907년 33세의 나이가 된 신석구 목사는 기독교가 자신을 찾고 잃어버린 자유를 줄 것이라는 한 친구의 권유에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이후 전도자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1908년 4월 감리회 소속 협성신학당에 입학해 신학공부를 시작했으며, 1917년 9월 24일 남감리회 매년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기독교를 믿고 나서는 기독교구국론에 근거해 종교인으로서 민족사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갖고 참여했다. 그리고 목사라는 직함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는 것에 대해 심적 고민이 되는 순간에도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움직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수표교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던 그는 오화영 목사에게 민족대표로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더욱이 독립운동을 위해 타종교와 연합해야 하는 상황에서 참여는 더욱 쉽지 않았다. 당시 선교사들은 신앙인들이 절대 정치적 일에 참여해서는 안 되며, 타 종교는 우상숭배로 어떤 일도 그들과 함께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왔다.

그 후 새벽마다 이 문제를 놓고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그러던 중 이러한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에 받았다고 한다. “4천 년 전 전해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 이 음성을 듣고 그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에 마지막 서명자로 참여하게 된다.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된 신석구 목사는 독립운동에 늦게 참여해 상대적으로 혐의가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아 2년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진리’ 외에 타협하지 않는 신앙인

일제가 대륙침략을 재개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1930년대 신석구 목사는 감리교의 지방을 책임지는 감리사로 활동했다. 그리고 그가 소속된 감리교회에서는 일제히 신사참배 강요에 공식적으로 순응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면서 수난을 겪었다. 그로인해 경찰서에 호출되어 조사를 받고 설교 중 연행되어 유치장 생활을 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교회 재건에 힘쓰며, 평양의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북한의 민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946년부터는 기독교와 대립하는 공산정권의 잘못을 조목조목 비판했으며, 공산당이 주는 3.1절 공로표창을 거부했다. 그런 상황에서 1949년 ‘진남포 4.19사건’을 배경으로 북한정권은 신석구 목사를 비롯한 진남포 지역인사 48명을 체포해 창고에 구금했다.

신석구 목사는 옥중에서도 흔들림 없이 신앙을 지키다가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받고, 1950년 10월 10일 후퇴하던 공산군에 의해 처형됐다. 그는 생전 항상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애국애족 항일정신을 바탕으로 민족의 고난에 동참했던 참신앙인이었다. 한국정부는 그의 반일독립투쟁 업적과 공헌을 기려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복장)을 추서했으며, 1968년 9월 18일에는 그의 유품을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민족적 과제에 침묵 말아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것도 죄이며, 어떠한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도 죄”라고 말했던 신석구 목사의 말을 되새겨 본다. 기독교가 보수극우화 단체라는 낙인이 찍힌 현 한국사회 분위기 속에서 오늘날 교회가 나가야할 방향을 그의 삶을 통해 찾을 수는 없을까.

이덕주 교수(감신대)는 “신석구 목사는 복음이 나라를 살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위기에 처한 나라와 민족 현실을 외면하고 ‘나만 구원받아 죽어 천국가면 된다’는 식의 이기적이고 현실 도피적 신앙을 경계했다”고 말했다.

특히 이 교수는 “신석구 목사는 8.15해방으로 당신 세대의 시대적 과제였던 ‘민족의 자주독립’을 보기는 했지만, 곧바로 이어진 민족 분단의 비극적 현실을 목격했으며 그 분단의 필연적 결과물인 전쟁 중에 순교로 생을 마쳤다. 분단의 희생제물이 된 신석구 목사님은 전쟁 후 세대인 우리에게 ‘민족의 평화통일’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넘겨준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통일문제를 비롯한 민족적 문제에 침묵했던 것에 대한 반성도 요청됐다. 윤경로 교수(한성대 사학과)는 “그동안 한국교회는 자신의 민족사에 대해 너무 무관심해 왔다”며,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민족의 선교적 사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민족사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려 한다면 적어도 민족적 과제이자 선교적 과제인 통일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사고와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이를 통해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이해하고 선교적 사명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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