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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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자들이다!
  • 노경실 작가
  • 승인 2019.03.12 13: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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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실 작가의 영성 노트 “하나님, 오늘은 이겼습니다!”-77
▲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누가복음 16장 19~31절).

잠언1:7>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얼마 전 나는 서대문의 한 노숙인자활센터에서 여덟 형제들과 큐티예배를 드렸다. 그 센터의 사회복자사인 최 팀장과 나는 한 달에 5~6회 정도 모여 예배를 드린다. 모두들 공공근로나 서울역의 채움터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와 급히 식사를 하고, 샤워를 한 다음 한 자리에 모인다. 노동의 끝, 급한 저녁식사, 샤워. 이렇게 세 가지를 한꺼번에 끝낸 형제들은 쏟아지는 졸음을 참고 운동복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큐티책과 볼펜을 들고 하나 둘 책상 앞에 앉는다. 30대부터 60대까지. 

대부분 치아가 거의 없거나(힘든 노숙생활로 인해), 한 문장을 말할 때마다 그 과정과 끝이 불분명한 사람이 많다. 노숙생활은 물론 어린 시절 고아로 지냈거나, 방치된 환경 속에서 대화다운 대화를 한 경험이 전무하다. 그런데다가 독서, 글쓰기 등을 접할 수 없었기에 말을 하나의 문장으로 완성지어서 한다는 것이 참 어렵다. 
 
그런데도 큐티 예배 때에 말씀을 저마다 자기의 삶과 적용할 때만큼은 듣는 이가 답답할만큼 서투르고, 버벅거리며 때로는 느리고 중언부언하지만 그 안에 진심과 정직함이 물씬 담겨 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은혜 속에 잠기고, 눈물도 글썽이며, 숨기거나 잊고 있던 죄를 끄집어내게 된다. 미성숙한 문장의 고백이지만 동료의 이야기 속에서 자기를 돌아보기에 충분하다.

나는 큐티예배 시간에 형제들의 적용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문단에서는 존경받는 지성인이라고 알려진 유명인이다. 날카로운 비평, 유려한 글솜씨, 도덕적인 삶,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지식. 그 분 앞에서는 누구도 함부로 지식자랑을 못 한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내가 조금씩 복음을 전했다. 성 어거스틴 정도는 우습게 몇 줄로 깔아뭉개는 그는 철학 분야에서도 대단한 실력자다. 그는 성경도 지식으로만 생각하며 비평을 한다. 그래도 나는 용기를 잃지 않고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씀을 전했다. 영어 성경책을 두 권 선물했다. 그러면 그는 ‘한글 성경의 번역이 너무 한심해서 영어로는 가끔 읽는다’며 성경을 소크라테스 책 정도로 여긴다.  

하지만 메일이나 전화 메시지로 찬송가를 보내면 ‘노예근성에 절은 음악을 보내다니!’라며 화를 낸다. 이 분에게 성경은 소크라테스의 저서 정도이고, 찬송가는 자기 삶이 독립적이지 않고 주체성 없는 노예들의 하소연으로만 여겨지는 것이다. 한번은 이스라엘 총리인 베냐민 네타냐후의 유엔 연설 영상을 보내주었더니 분노에 찬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어떻게 이런 무례한 짓을 할 수 있느냐?’며! (한국 지식인들은 이스라엘에 대해 분노해야만 참지성인라고 생각하는 분위기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다시 오심, 하나님의 천지창조, 영생, 천국과 지옥, 심판과 면류관... 이런 말씀을 어리석고 미련한 자들의 신화 정도로 여긴다. 그러면서도 마태복음 5~7장은 인류 최고의 교훈으로 인정하다.

어쩌면 사도 바울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린도전서 1:23)” 말씀과 똑같은지 답답할 뿐이다. 나는 이 분에게 여러번 모욕을 당했다. 하지만 철학적으로만 나에게 말을 하니 내가 어찌 당해내리요! 

지난주에도 찬송가 때문에 나는 모욕을 당했다. 복음을 전할 때마다 모욕이나 어리석은 자 취급을 받은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물론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핍박은 즐겁고 복된 것이다. 그러나 지식인들은 교묘한 말로 말씀을 전하는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데 능란하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성도들의 피의 절규요, 소망의 화산같은 찬송가를 함부로 말하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짓밟는 것 같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그 사람도 어쩌면 언젠가는 구원받을지 모르는데… 구원받을 사람을 미워할 것 같아 두렵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맡아주십시오.” 마치 신발의 먼지를 턴 셈이다. 

그러나 노숙인 형제들은 어떠한가! 보라! 누가 진정한 지혜자인가. 말씀 한 마디 한 마디 앞에서 졸음이 오는 걸 참으며 콜라를 마시면서도, 이빨이 거의 빠진 그 입으로 자기 죄를 고백한다. 슬리퍼 밖으로 나온 발가락을 꼬물락거리며 더듬거리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아주심을 증언한다. 

그들을 보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지혜자들이 이 자리에 있다! 라고 소리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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