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8세의 정치적 종교개혁(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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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의 정치적 종교개혁(3)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9.03.08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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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 영국의 종교개혁(5)

사실 헨리 8세는 종교개혁에 별로 흥미가 없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정치적인 이익이었습니다. 신앙 문제는 전통적인 교리 그대로 보수적으로 신봉했습니다. 그가 왕으로 있는 동안 종교 문제는 단지 정치 문제의 변화에 따라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로마와 관계를 끊고 자신을 교회의 머리로 세우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신학이나 예식의 개혁에 관해서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죽는 순간까지 가톨릭교도로 남아 있었습니다.

헨리 8세를 도와 ‘종교개혁 의회’를 이끌어 간 또 한 사람은 영국이 낳은 최고의 정치인 토머스 크롬웰(1485-1540)입니다. 그는 1529년 토마스 울지가 몰락한 후에는 헨리 8세의 신임을 받아 1534년 비서장관의 지위에 올랐고, 1535년 대법관으로 임명되어 수도원 해산을 단행하였습니다. 1540년 에식스 백작이 되었으나, 1556년 ‘피의 여왕’ 메리에 의해 화형을 당했습니다. 자세한 것은 메리 여왕을 이야기 할 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해 3월에 영국 국회는 로마 교황청의 개입 없이 영국 교회는 영국 교회의 문제를 자주적으로 결정할 것을 선포하고 영국 교회의 모든 감독을 영국 교회가 임명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헨리 8세의 캐더린과의 이혼을 합법화했습니다. 로마 교황청은 여전히 그들의 결혼이 합법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혼을 반대하였습니다. 

1534년 말에 영국 국회는 헨리 8세의 수장령에 첨가하여 “영국의 왕은 교회의 수장이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새 칙령은 많은 반대자들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헨리 8세는 자신의 개혁에 반대하는 자들을 과감하게 처단했습니다. 

1536년 국회는 헨리 8세에게 수도원을 탄압하도록 요청하였습니다. 헨리는 이제 대담하게 영국 교회를 다스리기 시작했고 먼저 국토의 6분의 1을 소유하고 있던 영국의 수도원들을 해산하였습니다. 수도원 소유의 땅들에 대하여 국가가 면제해주었던 막대한 세금이 이제 영국 국고에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헨리는 그 돈을 가지고 새 교구와 학교와 대학교수 수를 늘렸고, 소유가 없는 수도사와 수녀들에게 연금을 지불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헨리 8세는 여전히 가톨릭교회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였는데, 미사 때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부인하거나 신부독신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여섯 가지 신조’를 1539년에 발표하였습니다. 이 신조의 한 가지라도 어기는 사람은 처형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서의 영어 번역도 반대하여 틴들이 처형되었고 그 전의 성서번역자 위클리프의 무덤에서 해골을 파내어 화형 시켰습니다. 그러나 미사는 영어를 사용하여 집행하게 하였습니다.

헨리 8세의 영국 교회는 보수적인 가톨릭 신앙을 보존하였고, 라틴어 성서와 큰 영어 성서 두 가지를 교회당에 배치하여 평신도들이 읽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들로 하여금 틴들이 번역한 성서를 검토하고 라틴어와 희랍어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게 하였는데, 츠빙글리와 루터가 번역한 성서도 참고하였습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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