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시장바닥에 발을 딛고 ‘자주독립’의 꿈을 꾸다

그들이 꿈꾸었던 조국, 우리가 꿈꾸는 대한민국 ② 민중의 목회자, 전덕기 목사 한현구 기자l승인2019.03.06 10:00:12l수정2019.03.06 13:23l14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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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2019년, 본지는 신앙의 선배이자 민족의 선구자들의 삶을 통해 오늘의 대한민국을 바라보고자 한다.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켰던 선배들의 신앙을 우리는 얼마나 따르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소망한다.

<편집자 주>

총부리를 앞세운 일제의 협박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됐던 1905년. 을씨년스럽다는 말에서 가늠할 수 있듯 스산하고 침울한 분위기가 온 나라를 감쌌다. 그때 한 목사가 강단에서 뛰쳐나와 어깨에 도끼를 들쳐 매고 덕수궁 앞에 엎드렸다. “조약을 거두시든지, 아니면 이 도끼로 내 목을 치시라”고 절박한 목소리로 외쳤다. 서울 상동교회에서 상동청년회 회장을 맡고 있었던 전덕기 목사였다.

1875년 서울 정동에서 태어나 1914년 39세의 나이로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의 삶은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는 독립운동 결사단체인 신민회와 상동파의 숨은 주역이자 일생을 가난한 이들과 함께 했던 민중 목회자였다. 시선은 언제나 하나님 나라를 향한 채 손에는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을 외쳤으며 아래로는 민중들의 눈물 바닥에서 발을 떼지 않았던 목회자. 미처 광복의 감격을 눈에 담지 못하고 떠나야 했던 전덕기 목사가 꿈꿨던 나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 전덕기 목사.

행동하는 기독인, 전덕기 목사

전덕기 목사의 어린 시절은 순탄치 못했다. 9살에 부모를 여의고 남대문 일대에서 숯장사를 하며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숯으로 시꺼메진 시야가 밝아지기 시작한 것은 17세에 스크랜턴(W.B. Scranton) 선교사를 만나고부터다.

차별과 천대가 익숙하던 고아에게 신분과 나이에 상관없이 동등하게 자신을 대하는 선교사의 모습은 낯선 풍경인 동시에 감동으로 다가왔다. 스크랜턴 선교사의 집에서 일꾼으로, 또 요리사로 일했던 전덕기 목사는 선교사 부부를 만난 지 4년째인 21세에 기독교인이 된다.

기독교인이 된 후 전덕기 목사의 삶은 언제나 역동적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음을 예상이라도 한 듯 단거리 육상선수처럼 영혼구원과 자주독립을 위해 전력으로 달렸다.

그는 남대문 시장 바닥에서 1,000장의 전도지를 뿌리며 복음을 전하던 열정적인 전도자였다. 동시에 하층민들의 동네였던 남대문에서 어려운 이웃들을 돕기 위해 팔을 걷어 붙였다. 지금도 한국교회의 숙제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 논의되곤 하지만, 전 목사는 100년 전부터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 모두를 삶으로 실천했던 행동하는 기독교인이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전덕기 목사의 관심은 ‘영혼구원’뿐 아니라 민족의 ‘사회적 구원’에도 있었다. 민족의 사회적 구원이란 다름 아닌 대한의 자주독립이었다. 그가 상동교회에서 조직한 앱윗청년회(상동청년회)는 일진회 등 친일어용단체에 전면으로 맞서면서 민족운동가들이 모여 독립운동 전략을 논의하는 비밀공간 역할도 했다.

청년회 소속 기독인들과 함께 도끼를 들고 광장으로 나섰던 ‘도끼상소’ 사건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청년회는 심지어 을사오적 처단을 위해 평안도 출신 장사들을 모아 암살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훗날 백범 김구가 전 목사에 대해 전한 평가처럼 그는 ‘철저한 신앙심과 철저한 애국심을 바탕으로 민족적 과제 앞에 결코 미온적 태도를 보이지 않던’ 사람이었다.

교회 내 상동청년학교를 설립하고 민족 계몽과 교육에 힘썼으며 대표적인 독립운동 비밀결사 단체 신민회 조직의 중심에도 그가 있었다. 헤이그 밀사 파견 당시 이준 열사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한 것 역시 전덕기 목사였다.

하지만 그가 꿈꿨던 나라는 단순히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난 나라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독립 그 너머를 향해 있었다. 그는 주권을 가진 자유 대한민국은 물론이요 그 속에서 모두가 존중받고 평등한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길 꿈꿨다.

그 자신부터 하층민 출신이었던 전 목사는 민중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민중이 역사의 중심에 참여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는 성경의 ‘만민 평등’과 ‘동등 인권 사상’을 외치며 봉건 체제의 수혜자였던 상류계층의 행태를 신랄히 비판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것. 그것이 전덕기 목사가 믿고 꿈꿨던 하나님 나라의 공의였다.

 

▲ 전덕기 목사가 시무했던 상동교회의 모습.

나막신과 마른 쑥의 목회자

‘나막신과 마른 쑥, 그리고 의지(종이로 만든 약식관)’ 전덕기 목사가 목회에 가장 필요한 물품으로 꼽은 세 가지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이 물품들이 필요한 이유는 전 목사의 목회 환경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상동과 남대문 일대는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들이 뿌리내린 터전이었다. 전염병이 돌거나 돌볼 가족조차 없는 이들이 죽으면 선뜻 장사 지낼 사람도, 그럴 여유도 없었다. 이때 전덕기 목사는 마른 쑥 한 줌으로 코를 틀어막고 나막신을 신은 채 썩어 진물이 흐르는 시신을 손수 수습했다.

특히 가난한 집의 시신은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그의 손을 거쳤다. 남대문시장 부근에 사는 가난한 이들은 초상이 나면 으레 그를 찾았다. 장티푸스로 죽어 가족조차 손을 대지 못하고 있을 때 전 목사는 직접 염을 하고 장례까지 치러줬다.

1914년 오랜 지병인 폐병이 그를 하나님 곁으로 데려가자 어디서 몰려들었는지 모를 군중들이 교회로 몰려들었다. 남대문 일대의 거지들, 왈패, 건달로 불리던 이들이 관을 잡고 목 놓아 울었다. 사람 취급 받지 못하던 백정들도 통곡했고 장안의 기생들도 소복을 입었다. 그의 상여를 따르는 행렬은 십 리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그는 위대한 독립운동가이기 전에 전심으로 성도들을 돌봤던 목회자였으며 예수님의 사랑을 삶으로 실천했던 신앙인이었다. 그의 주변엔 안창호와 김구, 이동녕, 이회영 등 내로라하는 독립운동가들이 즐비했지만 그의 나막신은 언제나 남대문의 가난한 이웃들 곁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자유로운 주권 국가, 모두가 존중받는 평등한 사회, 낮은 자들과 함께 걷는 교회에 대한 꿈은 한국교회의 숙제로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한현구 기자  hhg@igood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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