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외쳤던 조선인의 용기, 슬픔보다 ‘희망’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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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외쳤던 조선인의 용기, 슬픔보다 ‘희망’을 느낍니다”
  • 김수연 기자
  • 승인 2019.02.25 23: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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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외국인’이 따라간 서울 속 3.1운동 발자취
▲ 대형 태극기가 걸린 서대문형무소 앞에 선 지피의 모습. 한민족의 항거가 응축된 형무소 곳곳에는 독립투사들의 고통과 더불어 그럼에도 꺾지 않았더 의지가 서려있었다.

“1919년 3월 1일은 대한민국이 해방된 날 아닌가요?” 나이지리아에서 온 한국살이 7년차 지피(God’s Power·GP)는 3.1절의 의미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다소 충격적인 대답을 내놨다. 아마도 1945년 8월 15일 광복절과 헷갈린 듯했다. 누가 뭐래도 한국을 사랑하는 자타공인 ‘대한외국인’ 지피도 유구한 역사까지는 미처 몰랐던 것.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의사를 세계만방에 알린 날”이란 설명에 지피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우리나라에 정착한 외국인 상당수는 지피와 다르지 않을 터다. 한국사에 대한 관심이 있어도 마땅히 배울 기회가 없는 게 이들의 현주소다. 지피는 “그렇다고 자발적으로 먼저 나서서 알려준 한국인 친구들도 적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러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기에 기자는 부끄러움과 동시에 사명을 안고 지피와 서울 안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르는 탐방에 나섰다. 부디 대한외국인들이 조금이라도 더 한국을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대한민국에 ‘자유’ 싹틔우다
첫 번째 목적지는 100년 전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거국적 만세운동이 촉발한 ‘탑골공원’이었다. 지난 20일 이른 아침, 지하철 종로3가역 1번 출구에서 지피를 만났다. 5분쯤 걸었을까 입구인 삼일문이 나왔다. 이제껏 이 일대를 토익학원과 술집이 즐비한 곳으로만 여겼다는 지피는 도심 한복판 숨은 사적지에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추운 날씨 탓에 이날은 유독 더 한산했다. 몇몇 노인과 외국인 관광객을 제외하고는 인적이 거의 드물었다.

당시 이곳에 집결한 약 5천명의 학생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비록 그날의 함성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탑골공원은 아직 그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바로 오른편에 있는 3.1독립선언기념탑이 눈에 띄었다. 지피는 그 뒤로 판각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과 독립선언문을 손으로 쓸어보며 더듬더듬 읽어 내려갔다. “우리는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 탑골공원에는 각 지역별 교회와 기독학교를 거점으로 확산한 독립운동의 모습을 동판에 조각한 부조(浮彫)들이 늘어서있다.

반시계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이번에는 각 지역별 교회와 기독학교를 거점으로 확산한 독립운동의 모습을 동판에 조각한 부조(浮彫)들이 나왔다. 아우내 장터에서 시위를 주도하는 유관순부터 일본경찰의 총칼에 의해 탄압받는 민족들의 고통스런 모습에 지피는 잠시 말을 잊기도 했다. “오직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하나 된 어린 학생들의 희생이 믿어지지 않아요. 그동안 한국의 많은 곳들을 가봤지만 여기가 가장 의미 있는 곳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는 탑골공원 중앙에 위치한 팔각정으로 눈을 돌렸다. 안전을 이유로 독립선언 장소가 태화관으로 변경된 줄 모르고 기다리던 군중들 앞에서 시골 전도사이자 학생대표였던 정재용이 엄숙하고도 떨리는 목청으로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곳이다. 팔각정 계단을 밟고 단상에 올라선 지피는 두 팔을 활짝 벌려 만세 포즈를 취하며 머릿속으로나마 가슴 뜨거웠던 감격의 순간을 그려봤다.

“인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구나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인데도 불구하고 목숨 걸고 쟁취해냈다는 게 너무 가슴 아파요. 동시에 죽음도 무릅쓴 저들의 나라사랑을 떠올리면서 ‘과연 나라면 저렇게 투쟁할 수 있었을까?’ 자문했어요. 선뜻 ‘Yes’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죠. ‘자유’가 느껴지는 이곳은 오늘날 한국에 평화를 가져다준 근원지 아닐까요.”

▲ 시골 전도사이자 학생대표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팔각정 앞에서 '자유'를 느껴보는 지피.

목숨 건 신앙인들의 ‘나라사랑’
지피와 발걸음을 옮긴 두 번째 장소는 무수한 독립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렀던 ‘서대문형무소’였다. 1908년 일제가 항일의병을 가두려고 지은 근대식 감옥으로 1945년까지 애국지사 약 4만 명이 수감된 것으로 전해진다. 해방 이후엔 독재정권에 맞선 민주투사들이 갇혀 고난을 견뎌내기도 했다.

한민족의 항거가 응축된 공간인 만큼 형무소 곳곳에는 일제의 온갖 핍박에 따른 절망, 그 가운데서도 꺾이지 않았던 투사들의 의지와 열망이 서려있었다. 우선 지피와 입장료 각 3천원을 내고 들어간 전시관 1·2층에는 일제강점기의 실상을 담은 글과 사진, 생존 독립운동가들의 육성 증언을 담은 영상이 마련됐다. “날카로운 못을 박아놓은 상자 안에 사람을 집어넣어 마구 흔들었다.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았다”는 이병희 애국지사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지하고문실에는 당시 끔찍했던 상황이 더욱 적나라하게 재현돼있었다. 강제로 수조에 머리를 집어넣거나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고춧가루 탄 물을 콧속으로 넣었던 물 고문실, 손톱 밑을 날카로운 꼬챙이나 금속으로 찔렀던 현장 등이 악명 높던 잔인함을 짐작케 했다. 옴짝달싹할 수도 없는 좁은 공간에 사람을 감금해 고통을 준 고문도구 벽관도 보였다. 둘러보는 내내 지피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굳은 표정을 지었다.

▲ 서대문형무소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독방에 갇힌 독립투사들의 모습이 재현돼있다.

독립운동가들의 처참했던 형편은 옥사에도 고스란히 묻어났다. 냉난방이 되지 않아 여름·겨울철 전염병자와 동사자가 속출했다고 말해주자 지피는 “인간이 이렇게 악할 수 있느냐”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순국한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이 나온 수형기록표 5천여 장이 붙은 벽 앞에 서서는 슬픈 감정에 공감해보기도 했다.

이쯤에서 지피에게 3.1운동의 교회사(史)적 의미를 설명해줬다. 만세운동 때 한국의 기독교인은 전 국민의 약 1.2%에 불과했지만 민족대표 33인 중 16명, 1919년 6월까지 투옥된 9,458명 중 2,087명이 신앙인이었을 만큼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고. “잔혹한 박해에도 그들이 신념을 지킨 건 미래 실현될 하나님의 공의를 갈망하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믿음 덕분인 것 같아요. 조금만 힘들면 불평하는 요즘세대에게도 이런 애국정신, 예수사랑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 '위안부'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수요집회'에는 처음 참석했다는 지피가 피켓을 들고 참가자들의 자유발언을 경청하고 있다.

끝나지 않은 투쟁…“일본은 사죄하라”
한편, 이토록 참혹했던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길 바란다던 지피를 이끌고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수요집회’였다. 일본군은 1930년대 초반부터 15년간 약 20만명의 한국여성들을 위안소로 끌고 가 성노예 생활을 강요했다. 14세에 연행된 김복동 할머니가 최근 별세하면서 현재 생존 할머니는 23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일본은 아직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사과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일본정부의 무책임한 과거청산으로 일제강점기 어두운 그림자는 여전히 남아있다.

이에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해결하고자 1992년부터 매주 수요일 정오 일본 대사관 앞에서 진행돼온 집회는 이날 1375차를 맞았다. 바닥에 앉은 100여명의 시민 가운데는 앳된 얼굴의 청소년들, 심지어는 아이들도 많았다. 이들은 ‘할머니들의 눈물을 그치게 해주세요!’ 등의 글귀가 적힌 피켓을 들고 “일본은 전쟁범죄를 인정하고 공식사죄와 법적배상을 이행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노란나비’에 따뜻한 목도리를 두른 소녀상도 시선을 끌었다.

▲ 수요집회에서 ‘노란나비’에 따뜻한 목도리를 두른 소녀상이 시선을 끌었다.

‘위안부’에 대해선 익히 들어 알았으나 집회 참석은 처음이라는 지피는 이 장면을 카메라에 담고자 연신 손으로 셔터를 눌러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사진 찍는 것도 잊고 집회에 빠져들었다. 어느새 피켓까지 따라 집어든 지피는 “전쟁을 겪진 않은 세대지만, 과거 만행을 반성하지 않는 일본을 설득하는 등 할 일이 많다”며 울먹이는 한 젊은이의 자유발언을 진지하게 경청하면서 영하권의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수요집회에 동참했다.

“미안하다는 한마디가 뭐 그리 어려운지, 저도 덩달아 일본에 ‘욱’했습니다. 가끔씩 불거지는 한국인들의 반일정서를 오늘에서야 이해했죠. 그래도 마냥 슬픔보다는 ‘희망’도 느낍니다. 일본이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할 때까지 이 나라 후손들이 포기하지 않고 투쟁을 이어감으로써 남은 상처들이 치유될 것을 믿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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