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가 맹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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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가 맹신인가?
  • 송용현 목사
  • 승인 2019.02.25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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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용현 목사/안성중앙교회

자꾸 넘어지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8살이 될 때까지 얼굴이 성한 데가 없었고 찢어져 한 두번 꿰멘 게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길 건너 친구가 부르자 이 아이는 또 뛰어갑니다. 그러다 또 넘어집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돌부리에 넘어진 것도 아니고 어떤 장애물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아이가 안짱다리였습니다. 외부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것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모르는데 묻지 않는 것입니다. 

창세기 11장에서 25장에까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은 삶의 방향을 바꾼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데라는 자녀들의 미래와 자신들의 앞날을 생각하며 새로운 삶을 꿈꿉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동경하며 새로운 삶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우는 아브라함의 첫 번째 믿음의 요소와 조건은 ‘순종’입니다. 순종(휘파쿠오)이란 ①복종하다, 따르다 ②듣다, 대답하다 ③열다 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따른다’ 라는 뜻이긴 하지만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10:17)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대답하는 삶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며, 행 12:13절의 ‘시몬 베드로의 문 두드리는 소리에 로데라는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라는 구절에서 쓰인 것처럼 순종이란 영접하는 것 즉, 하나님께 입술을 열어 기도와 찬송하는 행위이며 나의 생각과 마음을 온전히 여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에게 닥친 시험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시험이었습니다. 그의 후사였던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번제물로 드리라는 것은 그를 죽여 피를 흘리고 각을 떠서 드리라는 것입니다.

당시 고대 근동의 문헌을 살펴보면 몇몇 이방 종교들 가운데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풍습들이 있기는 했지만 내가 섬기는 참신이신 여호와께서 그렇게 요구하실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무자했던 자신이 나의 상속자는 에리에셀이라고 했고(창 15:2), 아내의 협조하에 이스마엘을 후사로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을 때 그는 결코 너의 후사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할례 후,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주실땐 언제고 이제는 그 자식을 다시 내 놓으라 하시니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여호와였을 것입니다. 모리아산으로 가는 삼일 길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고통의 길이었으며 한숨과 비탄의 길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위대한 부활의 신앙고백을 엿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잡히시자 멀찍이 좇아가던 베드로, 주님을 3번이나 부인했던 그였으나 부활의 주님을 목격한 후 죽음을 불사한 순교의 신앙으로 거듭났던 것처럼 아브라함의 가슴속에는 내가 죽이나 하나님께서 살리실 것을 믿는 부활의 신앙이 그의 가슴에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지금까지 이런 믿음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신앙인가? 맹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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