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함성, 1919',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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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함성, 1919',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쓰셨다"
  • 이인창 기자
  • 승인 2019.02.23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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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 동요작곡가 ‘박재훈 목사’

40년 준비한 3.1절 창작오페라 발표
‘어서 돌아오오’ 등 찬송가 9곡 수록

▲ 동요와 찬송가 작곡가 박재훈 목사(오른쪽)가 이기균 지휘자와 함께 오페라 ‘함성, 1919’를 무대에 올렸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어서 돌아오오’, ‘산마다 불이 탄다 고운 단풍에’, ‘눈을 들어 하늘 보라’ 등 한국교회 성도들이 애창해온 찬송가를 작곡한 박재훈 목사가 40년을 준비한 끝에 3.1운동 기념 오페라를 창작 발표한다.

올해 우리나라 나이로 98세를 맞는 토론토큰빛교회 박재훈 원로목사가 생애 마지막이 될 수 있는 고국을 최근 방문했다. 갑상선암을 앓고 있고 폐렴 증세로 의사가 극구 만류했지만 자신이 작곡한 3.1운동 100주년 기념 오페라 ‘함성, 1919’ 공연을 직접 보고 알리기 위해서다.

박재훈 목사는 ‘어머님의 은혜’, ‘산골짝의 다람쥐’, ‘송이송이 눈꽃송이’, ‘펄펄 눈이 옵니다’, ‘시냇물은 졸졸졸졸’ 등 전 국민이 애창해온 동요를 작곡한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작곡가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교회가 사용하는 찬송가에는 그가 작곡한 9곡이 수록돼 있다.

“손가락이 가슴에 박힌 것 같았어요”

지난 20일 만난 박재훈 목사는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에 앉아있고 호흡이 어려워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음악을 향한 여전한 열정과 고국에 대한 애정을 숨길 수 없었다. 특히 고령의 작곡자는 3월 1~2일 여의도 KBS홀에서 초연되는 ‘함성, 1919’가 “하나님께서 40년간 단련하게 하신 후 짓게 하신 작품”이라며 젊은이처럼 설레고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 오페라 ‘함성, 1919’ 홍보 포스터.

박재훈 목사는 지금까지 오페라 ‘에스더’, ‘유관순’, ‘손양원’을 발표했다. 이번 작품은 3.1운동 당시 민중들의 함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해낸 그의 네 번째 오페라이다.

박재훈 목사의 첫 오페라 ‘에스더’는 1972년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됐다. 당시 공연을 관람한 사무엘 마펫 선교사는 “한국 기독교가 들어온 지 100년이 안 되었는데 에스더 같은 작품이 나온 것은 기적”이라며 극찬했다. 

박재훈 목사는 “마펫 선교사가 다음에는 어떤 작품을 하겠냐고 물어 내가 우물쭈물 하니까, 내 가슴팍에 손가락을 대고 3.1운동이 어떠냐고 하셨지…. 그 손가락이 가슴에 박힌 것 같아요. 한양대에서 작곡과 교수로 있었고 영락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를 했지만 그 때 내 실력으로 쓰기 어렵다고 생각했어요.”라며 회상했다.

그 사건이 전환점이 돼 1973년 박 목사는 음악을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작곡을 공부하던 중 캐나다에서 교회음악 책임자로 활동했으며 60세 나이에 목사안수까지 받았다. 토론토큰빛교회를 개척해서는 부흥성장도 이뤄냈다. 항상 창작열을 불태우고 곡들을 선보였지만 3.1운동은 여전히 박 목사의 마음에 남은 숙제였다. 그리고 이번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 숙제 결과를 하나님 앞에, 대한민국 앞에 제출했다.

곡 작업은 서울장신대 총장을 지낸 문성모 목사가 대사를 완성하면서 2013년부터 진행됐다. 그 때도 박 목사는 구순을 넘긴 나이였다. 지난 성탄절과 연말, 새해맞이 때까지 곡을 완성하기 위해 열정을 불태웠다.

“만세 한마디 했다고 칼에 맞고 불에 타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제암리교회는 스코필드 선교사가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지만 누군가 발표해주지 않아 잊혀진 채 죽은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전국의 교회, 북간도와 서간도의 교회에도 예수를 믿고 만세를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죽어야했습니다.”

“음악공부를 더해서 그 고통의 역사를 3.1운동 작품으로 쓰겠다고 생각했고, 10년이면 될 것같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오페라 ‘함성, 1919’가 만들어지는 일등 공로자는 박재훈 목사라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런데 박 목사는 3.1절 기념공연이 나올 수 있도록 한 공로를 지휘자를 비롯한 제작팀과 공연팀에게 돌렸다. 특히 이번에 공연을 맡은 고려오페라단 이기균 예술총감독 및 지휘자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실제 공연팀은 급한 일정과 예산문제 등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사명감에 따라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보통 오페라의 경우 주연배우를 더블캐스팅이나 트리플 캐스팅 하지만, ‘함성 , 1919’는 재정이 부족해 모두 출연진이 단일 캐스팅이다.

이기균 총감독은 “배후 한사람이라도 다치거나 낙오되면 큰 일이 나는 만큼 많은 기도가 필요하다. 재정적인 필요도 있지만 무엇보다 거룩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도록 관중들이 감동을 받고 호응해 주었으면 한다”며 기도를 요청했다.

모든 음악은 하나님 찬양으로 족하다

1922년생 박재훈 목사에게 일제 치하 당시에 대한 기억에 대해 질문했다. 그는 평양에서 2백리 떨어진 어느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일사각오 설교를 하신 산정현교회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하셨을 때 평양에 있었습니다. 그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평양의 공기가 일순간 다 얼어붙었어요.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랬어요. 20대 때였는데 평양의 교회들은 일제와 싸우면서 순교를 생각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마침내 1945년 8.15 해방이 되었다. 기쁨이 컸지만 박재훈 목사, 당시 20대 젊은 교사에게는 하나의 고민이 생겼다. 당장 9월에 개학을 하면 아이들이 우리말로 부를 수 있는 동요가 없었던 것이다. 모조리 일본군가에 맞춰 노래를 가르쳤으니 그럴 만도 했다. 박 목사는 당시 기독교서회에서 주일학교 아이들을 위해 발행한 잡지 ‘아이생활’(해방 후 새벗) 50권을 친구에게 빌려, 그 안에 들어있는 동시들을 가지고 골방에서 곡 작업에 몰두했다. 

“단 사흘 만에 50곡을 썼어요. 가사만 있으면 무조건 곡조를 썼습니다. 그 중 25곡을 남겼어요. 그런데 공산당이 평양을 점령하면서 살 수 없게 되어서 1946년 부활주일 아침에 38선을 넘었습니다. 서울에 와도 동요가 없는 것을 보고 동요 악보를 등사기로 직접 밀어서 명동의 국제음악사 앞에 쌓아놨는데 이틀 만에 다 나간 거예요.”

우리가 지금까지 부르는 사랑스러운 동요 곡들은 그 때 사람들의 입을 타고 퍼져갔던 듯하다. 찬송가도 마찬가지였다. 1960년대 한국찬송가위원회에서 찬송가집을 발간하는데 죄다 외국 곡이었다. 공모를 했어도 한국 사람이 쓴 곳이 거의 없었다. 당시 박 목사가 썼던 곡들이 있어서 담아낼 수 있었다. ‘어서 돌아오오’ 경우는 1943년 21살 나이에 쓴 곡이기도 하다. 한국교회 찬송가 역사에 대해서도 그는 산 증인이었다. 

백수가 다 되어가도록 음악과 함께하는 삶을 살았던 박재훈 목사에게 음악은 도대체 무엇일까. 

“1946년 서울에서 처음으로 오페라 춘희, 카르멘을 보았을 때 내용이 참 악하다고 여겨서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 음악은 찬송가에 국한되지 않아요. 노래가 구성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족합니다.” 

박재훈 목사에게 모든 음악은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으로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 이번 3.1절 100주년 오페라 ‘함성, 1919’도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으로 여기고 그는 곡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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