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 일궈낸 기독학교의 ‘구국교육’ 다시 세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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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 일궈낸 기독학교의 ‘구국교육’ 다시 세울 때”
  • 김수연 기자
  • 승인 2019.02.18 20: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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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100주년, 한국교회에 되묻다 (2)
▲ 3.1운동은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평범한 민중들, 특히 어린 학생들이 주역이었다. 사진은 3.1운동에 참여한 이화학당 여학생들로 윗줄 맨 오른쪽에 유관순 열사가 자리하고 있다. [사진=국가보훈처]

1919년 3.1운동은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평범한 민중들에 의해 일어났다. 특히 주목할 점은 연약해 보이는 어린 기독학생들이 주역이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학교’에서의 배움 덕분에 굳건한 애국심과 신앙으로 무장한 이들은 온갖 박해와 고문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전국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일부 권력가와 지식인들이 조선의 독자적인 힘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며 비관할 때도 기독학생들은 국민을 계몽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지금의 기독교학교는 공공성을 잃고 정체성의 위기를 맞은 지 오래다. 나라에 목숨 바쳐 공헌한 신앙선배들을 뒤이을 다음세대 양육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제 다시 한 번 기독교교육의 ‘갱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3.1운동 100주년, 한국교회에 되묻다’ 그 두 번째 특집으로는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대한독립 만세를 실현시킨 기독교학교의 역할과 정신을 재조명함으로써 교사와 학생 모두가 긍지를 회복하고 향후 풀어나가야 할 과제를 점검해본다.

항일운동의 진원지 ‘기독교학교’
전문가들은 “기독교학교는 3.1운동의 주축으로서 시대적 사명을 감당했다”고 입을 모은다. 그 이유로는 먼저 기독교학교가 항일운동의 진원지였음을 꼽는다. 1885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세운 배재학당·경신학당은 한국 근대교육과 기독교학교의 효시다. 이후 해외선교사들과 한국 토착교회가 전국에 설립한 830여 곳의 기독교학교는 3.1운동이 거국적으로 확산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각 지역의 거점으로 활용되며 일사분란하고 조직적인 운동을 이끈 것이다.

이곳에서 훈련받은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이들은 늦은 밤 학교에 은밀히 모여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시위에 참여하는 군중들에게 부지런히 나눠주며 어른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학교에 교육 자료를 만들 수 있는 복사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였다. 이 같은 방법으로 서울의 배재·경신·이화학당과 정신·보성여학교를 비롯해 공주·군산·전주·광주·목포·대구·마산·부산에서 기독학생들의 활약은 실로 엄청났다.

가령 경신학교는 민족대표들과 함께 학생들의 집결방안을 모색하는데 힘을 모았다. 배재학당 학생들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김진호 교사의 지시 아래 독립선언서를 각국 공영사관에 전달했다. 동시에 기숙사는 비밀모의 장소로 사용했다. 숭실학교는 대형태극기를 제작해 평양에 게양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아울러 숭실학생고적대는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를 연주하며 3.1만세시위 행렬을 인도해 감동을 안겼다.

3.1운동 때 전주신명여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학진 할머니는 친필 회고록을 통해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상급생 언니들이 ‘우리가 공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것’이라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마음에 뜨거운 열성이 불붙기 시작했다. 기숙사 이 방 저 방에 쫓아다니면서 태극기 만들기와 그날에 입고 나갈 의복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3월 1일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들 수는 5,000여 명으로 추산된다.

‘구국신앙’으로 무장한 학생들
이처럼 일제의 무자비한 총칼에도 죽음을 각오하고 무릎 꿇지 않던 학생들의 모습은 ‘건학이념’을 굽히지 않은 기독교학교 교육의 당연한 결과였다. 장신대 박상진 교수는 “일제는 을사늑약 이후 황국신민을 강요하며 우리나라에 보통(국민)학교를 정착시키고 사립학교 탄압을 강화했다”며 “그러나 기독교학교는 ‘한국사회에 이바지할 실력과 신앙을 겸비한 인재 양성’이란 설립정신을 지켜 거세게 저항했다”고 했다. 그는 “기독교학교는 보통학교 인가를 거부하고 잡종학교로 명맥을 유지하며 심한 핍박을 받거나, 스스로 폐교도 불사했다”고 부연했다.

덕분에 기독교학교는 구국신앙과 애국애족을 고취시키는 중요한 통로가 됐다. 기독교학교는 이스라엘 민족 해방의 역사이자, 인간의 존엄성과 고난 가운데 의인의 승리를 강조한 성경을 제1의 과목으로 정하고 민족교육과 항일운동의 교과서로 삼았다. 국어·음악 등 일반 교과목들도 ‘기독교 민족주의’ 정신에 입각해 가르쳤다. 3.1운동에서 유독 10대 여학생들의 활약이 돋보인 것 역시 자유와 평등, 공적신앙을 깨우친 종교적 배움에서 비롯됐다.

연세대 최재건 박사는 ‘3.1정신과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이란 논문에서 “교회·학교가 중심이 된 독립운동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실천’한 것”이라며 “(그들은) 예수 믿으면 나라와 민족(이웃)도 사랑한다는 ‘애국정신’을 증명했다”고 밝혔다. 이어 “독립선언서에 나타난 자유·민주·정의·인도·생존·존영·평등·평화의 정신을 두루 갖춘 기독교 사상은 사실상 건국정신의 기초가 됐다”고 덧붙였다. 이렇듯 복음전파에 국한되지 않은 기독교교육은 곧 구국운동의 밑거름이 됐다.

3.1운동은 스승과 제자가 하나 된 운동이기도 했다. 학생들은 삶과 신앙의 일치로 모범을 보인 교사들을 존경하고 신뢰했다. 한 예로 신명여학교 임봉선 교사는 “공부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이라며 전교생 만세시위를 선동했다. 그는 1년간 옥고를 치른 끝에 후유증으로 26세에 생을 마감했다. 숭실대 함승수 교수는 “교사직을 안정된 직업이 아닌 ‘교육 구국’이란 소명의 자리로 여기고 학생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오늘날 ‘존립’ 위협받는 기독교교육
그렇다면 작금의 교육현실은 3.1정신을 얼마나 잘 반영하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전문가들은 “기독교학교라고 일반학교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시선에 ‘존폐’ 여부마저 위협받는 상황”이라고 진단한다. 기독교학교 존재의 당위성이 흔들리는 첫 번째 요인으로는 고교평준화 정책으로 인한 사립학교의 자율성 침해를 들 수 있다. 학생선발·교육과정·교사임용·등록금 책정·법인구성 과정에서 규정이 엄격해 기독교학교의 건학이념을 구현하기 힘들다는 게 기독교육계의 항변이다.

그러나 기독교학교의 존립 위기를 외부요인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높다. 함승수 교수는 “요즘 기독교학교의 문제점은 신앙교육의 약화”라고 지적했다. 그는 “평준화 제도라고 신앙교육이 불가능한 건 아니다. 기독교학교가 일반학교처럼 지식만 전달하는 ‘학원’으로 전락하지 말고 다시금 신앙을 우선순위에 두는 진정성 있는 노력을 기울일 때”라고 강조했다. 그러려면 “3.1운동 시 교사들이 지닌 ‘성육신적’ 태도를 계승해야 한다. 올바른 소명과 영성 위에 선 기독교사 양성이 시급하다”고도 했다.

끝으로 기독교학교가 교회와 협력해 ‘공공성’을 되찾을 것도 요구된다. 하나님 뜻에 부합하는 교육으로 세상을 변화시켰던 학교들은 어느새 공교육에 편입되면서 본질을 잃었다. 명문대 진학을 목표로 입시경쟁에 뛰어드는가 하면, 정부의 재정지원이 부족해 학생들이 내는 학비와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탓에 ‘귀족학교’라는 오명까지 썼다. 이제라도 세속적 가치에 함몰되지 않은, 신실하고 유능한 기독인재들이 배출돼 공의로운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야 한다.

박상진 교수는 “기독교학교는 한국교회가 담당하는 사명의 연속선상에 있다”며 건강한 교사와 학생들을 길러내기 위해 기독교학교는 교회와도 긴밀히 협력하는 등 상호 지원체계를 구축할 것을 주문했다. 그는 “100년 전 믿음의 선조들을 귀감삼아 다시 번 기독교학교가 나라와 민족을 새롭게 하는 불씨가 돼야 한다. 모든 면에서 ‘기독교학교다움’을 되찾자”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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