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독립선언서를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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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독립선언서를 다시 생각한다
  • 김학준 교수
  • 승인 2019.02.12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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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준 교수/단국대학교 석좌교수

올해는 민족적 거사였던 3·1독립운동 백주년의 해이면서, 동시에 3·1독립운동을 촉발시킨 하나의 중요한 계기였던 2·8독립선언 백주년의 해이기도 합니다.

1918년 11월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1919년 1월에 평화회담이 파리에서 열리게 되자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습니다. 조선도 독립을 성사시켜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기에 이르렀습니다.

개항을 전후한 시기 이후 반세기에 걸쳐 항일의병들이 또는 독립운동가들이 전개해오던 독립운동의 자랑스러운 전통 속에서 이 기회에 또 한 차례의 거국적 독립운동을 일으켜 성사시키겠다는 뜻을 다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우선 나온 것이 1919년 2월 8일 동경의 조선유학생들이 조선청년독립단의 이름으로 발표한 2·8독립선언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곧 이 독립선언서를 일본국회에 제출하려고 했으나 일본경찰은 현장에서 그들 중 60여명을 체포했습니다.

그러면 2·8독립선언은 어떤 내용을 담았던 것일까요?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만국 앞에 독립을 선언하노라”라고 시작한 2·8독립선언은 이어 일제 조선식민통치의 불법성과 야만성을 거세게 비난했습니다. 그 토대 위에서 이 선언은 우선 다음과 같은 뜻을 밝혔습니다.

△조선=한국은 자주독립국가로서 이른바 한일합방은 한국인의 뜻에 어긋나는 것. △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한국병합을 솔선해서 승인한 죄가 있으므로 속죄의 의무를 질 것. △ 이에 응하지 않을 때 우리 민족은 자유행동을 취해 독립을 달성할 것. △ 앞으로 독립할 국가는 민주주의 원리에 따르는 신국가로 세계평화와 인류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할 것.

2·8독립선언은 우리 민족이 국권을 빼앗긴 이후 처음으로 발표된 독립선언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습니다. 2·8독립선언은 일제의 심장부인 일제의 수도에서 대낮에 공개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놀랍기도 하고 장하기도 한 쾌거였습니다. 일제의 얼굴에 백주에 따귀를 때린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2·8독립선언은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일제와 ‘영원한 혈전’을 벌인다는 뜻을 다짐했습니다. 또한 국제평화주의를 지향할 것이라고도 다짐했습니다.

‘2·8독립선언서’가 조선=한민족의 항일독립운동에 끼친 영향은 참으로 컸습니다. 조선=한민족이 일제의 식민통치를 거부한다는 뜻을 세계만방에 알렸으며, 그때 파리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에 참석을 준비하고 있던 김규식을 비롯한 조선혁명당대표단을 고무시켰습니다.

무엇보다 국내에 전해지면서, 민족지도자들과 학생들에 큰 자극을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때로부터 3주 뒤인 1919년 3월 1일에 거족적·거국적·독립운동이 조선=한반도 안에서 일어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때 발표된 ‘3·1독립선언서’는 ‘2·8독립선언서’의 뜻을 대체로 이어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3·1독립운동의 여파로 1919년 4월 11일에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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