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종교개혁의 아버지 토마스 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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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종교개혁의 아버지 토마스 빌니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9.01.30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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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 영국의 종교개혁(1)

영국의 종교개혁을 이야기하면 맨 먼저 영국 왕 헨리8세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가 첫 번째 아내인 캐더린이 왕위를 이을 왕자를 낳지 못하자 로마교황에게 이 결혼을 무효화 시켜 달라고 요청했지만 로마교황이 쉽게 결정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헨리 8세는 교황권을 거부하고 자신이 영국교회와 성직자들의 수장이며 보호자임을 천명함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영국의 종교개혁이 쉽게 진행될 수 있었던 다른 요소가 있었다면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성서와 그 밖의 당시 교회를 비판한 그의 저서들이 보급되었습니다. 특히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들이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중 한 사람이 토마스 빌니(1495-1531)입니다.

빌니는 ‘영국 종교개혁의 아버지’라 불리는 16세기 초기의 종교개혁자입니다. 동시에 역사는 이분을 영국 종교개혁사에 있어서 최초의 순교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빌니의 어린 시절은 알 길이 없습니다. 약 1516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홀에 입학한 빌니는 수줍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몸도 약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망과 하나님의 평화를 찾는 그의 갈망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했습니다.

빌니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신자로서 사제들과 교류하면서 지냈지만 가톨릭의 가르침과 사제들의 모습을 보면서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 가운데서 빌니는 에라스무스가 헬라어 신약성경을 라틴어로 번역된 성경을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빌니는 몰래몰래 숨을 죽여 가며 읽게 됩니다.

빌니는 디모데전서 1장15절 말씀을 보며 “나는 바울처럼 괴수였다. 아니 죄인들 중에 괴수였던 바울보다 더 악한 자였다. 하지만 이제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중생을 경험한 빌니는 더욱 더 성경의 진리를 탐구하는데 힘을 쏟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을 찾게 되었고 이 기쁨을 감출 수 없어 대학들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의 복음을 듣는 자들은 놀라워했고 결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빌니는 자그마한 성경공부반을 만듭니다.

성경공부반을 통해 큰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신학교수인 스태퍼드가 가톨릭으로부터 개종하게 된 것입니다. 그의 개종은 케임브리지 대학을 흔들어 놓았고 그의 강의를 통해 젊은 학생들이 개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윌리엄 틴데일은 빌니의 가르침을 통해 성경번역의 꿈을 키워가게 됩니다.

1527년 빌니는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파하기로 마음을 먹고 동부 앵글리아로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훗날의 역사가들은 빌니를 ‘영국 최초의 개신교 전도자’라고 명명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는 사도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게 되는데 그의 전도 생활은 약 4개월 만에 끝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빌니는 1527년 5월 28일, 입스위치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검거되어 11월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감독청에 소환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든지 화형에 처해지든지 선택을 해야만 했습니다. 1531년 8월 19일 아침, 빌니는 영국 종교개혁에 있어 최초로 화형을 당하는 자로서 마지막으로 땅을 밟았습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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