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갈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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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갈등시대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9.01.22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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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 프랑스의 개혁운동(3)

프랑스의 개혁 운동의 마지막은 박해와 살육의 시기입니다. 1559년 박해자 앙리 2세가 죽고 프랑스 안에서 개혁주의 운동이 힘 있게 전개되자, 칼뱅은 잘 훈련받은 120여 명의 목사들을 파송하였습니다. 그 결과 프랑스에는 2,150개의 개혁 교회와 150만여 명의 신자가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위그노의 세력이 커져가면서 위그노와 로마 가톨릭 사이의 갈등도 깊어갔습니다. 앙리 2세를 이어 프랑수와 2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1년 만에 죽고, 그의 아우 샤를르 9세가 왕위에 오르자, 앙리2세의 미망인 캐더린은 직접 섭정에 나서서 진보적인 인물 미쉘 드 로피탈을 재상으로 등용하고, 자신의 뜻에 따라 국정을 운영하였습니다.

로피탈은 1562년 위그노에 대하여 관용적인 정책을 펴도록 캐더린 메디치를 설득하였습니다. 캐더린은 정국의 안정을 위하여 1560년 1월 ‘생 제르멩 앙 레이’에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위그노의 실체를 인정하였고, 도시 밖에서는 위그노의 예배를 허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측이 칙령의 준수를 거부하면서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측은 위그노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1562년 3월 샹퍄뉴 지방의 바시 계곡에서 예배를 드리던 위그노를 습격하여 300명 이상을 살해하였습니다. 위그노들도 콜리니 제독, 나바르의 앙리와 콩드를 중심으로 무력 항쟁을 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여 지교회 책임자를 대위, 노회의 책임자를 대령, 각 지역의 최고 책임자를 장군으로 세우도록 하여 교회를 군사 조직화 하였습니다.

내란의 조짐이 일어나자, 캐더린은 위그노를 진압하기 위해 스위스와 독일 출신의 용병들을 고용하고,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원조를 요청하였지만 위그노들은 오를레앙, 리용과 같은 도시들을 함락하였고, 개혁 운동의 거침돌이 되던 기즈 가문의 프랑수와 공을 살해하였습니다. 전쟁을 통해 서로가 이득을 볼 수 없음을 깨닫자, 위그노와 프랑스 정부는 1563년 ‘암보아즈 평화조약’을 맺음으로 휴전을 선언하였습니다. 

내란의 와중에서도 위그노들은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점차 교회가 안정되면서 위그노의 수가 급속히 증가하여 1572년에는 프랑스 인구 2천만 가운데 3백만이 위그노가 되었습니다.

위그노의 세력이 커가자 캐더린은 위그노 지도자 콜리니를 암살하고자 하였습니다. 살인 계획이 폭로되자, 위그노들이 정부에 진상 조사를 요구하여 캐더린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위그노에게 사과하거나 그들의 세력을 뿌리째 뽑아내는 것뿐이었습니다. 캐더린은 모든 위그노들을 처치할 음모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캐더린은 그의 딸 마가레트와 개혁 교회의 지도자 나바르의 왕자 앙리를 결혼시킴으로 음모를 실천에 옮겼습니다. 종교 전쟁의 종식을 기대하는 수많은 인파가 결혼 축하를 위하여 몰려들었으나, 축하연이 거의 끝나갈 무렵 살해 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캐더린 메디치는 샤를르 9세에게 1572년 8월 24일 바돌로뮤 축제일 밤, 생 제르멩 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하여 모든 위그노에 대한 대대적인 살육을 자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살인자들은 교회당 주변을 포위하여 결혼 축하 예배에 참석하였던 사람들을 전멸하였습니다. 콜리니를 비롯하여 약 3만 명에서 7만 명의 위그노들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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