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한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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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한 후에?
  • 노경실 작가
  • 승인 2019.01.22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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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실 작가의 영성 노트 “하나님, 오늘은 이겼습니다!”-74
▲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서 히스기야가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고 (열왕기하 19장 14절)

역대하 32장> 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한 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에 들어와서 견고한 성읍들을 향하여 진을 치고 쳐서 점령하고자 한지라(1) 그 후에... (9)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므로... (24)

차마 실명을 밝힐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는 돈과 명예, 전문적인 직업 등등 이 모든 것을 갖추어서 말 그대로 마음껏 인생을 풍미하며 산 사람이다. 특히 연예인 등과의 소문과 결혼, 이혼 등으로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공인이다. 그런데 지난 주 출판 일로 이 사람을 만나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인터넷으로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훑어보았다. 이제는 일흔이 넘은 노인으로 전문직업인의 자리에서 물러날 준비를 하며, 지방에서 조용히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부와 명예를 가지고 있고, 건강하며, 심지어는 젊은 여인과 또 결혼을 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에게는 왜 하나님을 찾을 만큼 고난의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시편 73편 말씀도 생각났다.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물론 그 사람이 악인이라는 것은 아니다.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하나님 앞으로 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또는 아예 하나님을 모른 채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윗이 악인의 형통함에 질투의 속마음을 쏟아낸 것처럼 나 역시 잠시 힘들었다.

이러한 생각은 내가 어릴 때 보아왔던 집사님이나 권사님들에 대한 기억으로 옮겨갔다. 그 중, 남편과 사별하여 노동으로 초등부터 고등학생까지 4명의 아이를 키우는 집사님은 어려움 속에서도 십일조생활과 새벽기도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오죽하면 그때, 나는(영성이 바닥이어서였을까?) 집사님에게 ‘당분간 십일조하지 마세요.’ 라고 말했었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늘어놓자면 성도들마다 ‘그 정도는 사연도, 고난도 아니요! 나는 여러분이 기절할만큼 끔직하고 슬픈 사연이 있다오!’ 라고 소리칠 것이다.

우리는 늘 이런 이야기, 또는 현실 속에서 괴로워한다. 부자는 온갖 육적인 일로 하나님을 모른 채 살아도 날마다 평안과 재물이 늘어나는데, 왜 그리스도인은 눈물 뿌려 기도하고, 거룩의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쳐도 고난의 문을 자주 통과해야 하는가? 

이런 면에서 히스기야는 우리와 너무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 신앙 선배같다. 역대하 31장은 “히스기야가 온 유다에 이같이 행하되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였으니… 그의 하나님을 찾고 한 마음으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 라고 칭찬이 자자하다. 그러나 32장의 첫 구절은 놀랍게도 “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한 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에 들어와서 견고한 성읍들을 향하여 진을 치고 쳐서 점령하고자”이다. 이것이 소설이라면 독자들은 너무 비상식적이라 작가에게 항의할 것이다. ‘충성 다음에는 당연히 보상이 따라야 되는 게 아닌가요?’ 하며. 그런데 이뿐 만이 아니다. 

앗수르의 공격에 히스기야가 백성들에게 ‘앗수르와 함께 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 라고 설득했다. 그래서 백성들은 “히스기야의 말로 말미암아 안심(32:8).”했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그 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그의 온 군대를 거느리고(32:9)” 온 것이다. 

-칡뿌리처럼 결코 끊어지지 않을 것 같은 온갖 우상과 더러움을 다 없애고 신앙개혁을 철저히 하고 난 뒤에도, 

-나라와 백성들의 운명이 걸린 상황에서도 말씀으로 소망을 품고. 버티어 내려고 몸부림치는데도,

-그리고 ‘히스기야가 모든 나라의 눈에 존귀하게 되어서(32:22-23)’ 이제 백성들과 편안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 만하니까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된다(32:24)

이쯤 되면 독자들은 역대기하를 쓴 작가에게 항의할 것이다. 선한 사람이 선하게 살 때마다 시련 속으로 몰아넣는 까닭이 무어냐? 악당들이 날마다 힘이 커지는 세상에 왜 성경 속 등장인물들은 우리를 통쾌하게 만들어주지 않느냐? 이제 더 이상 “거부 아브라함, 총리 요셉, 왕조가 바뀌어도 권력의 자리에 앉게 되는 다니엘”은 이제 기대할 수 없는 거냐? 물론 이런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듬어 가신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래도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앞서 말한 일흔 평생토록 누리며 사는 남자. 단, 그에게 없는 것은 오직 하나님. 평생 단 한번도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보지 못한 집사님. 단, 그녀에게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나는 어느 역할을 자처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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