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밤 ‘촛불 하나’ 된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상태바
“깜깜한 밤 ‘촛불 하나’ 된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 이현주 기자
  • 승인 2019.01.03 01: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절기목회로 나눔과 섬김 실천하는 ‘왕성교회’

절기마다 바빠지는 교회가 있다. 지난 성탄절에도 예배가 끝나자마자 성도들이 6곳으로 나뉘어 ‘흩어진 예배’를 드렸다. 20명 이하의 작은 교회와 장애인 교회, 청소년쉼터 등 성탄이 오히려 외로운 이들을 찾아가 함께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전달했다. 

부활절 헌금은 지역 내 다음세대를 위한 장학금으로 사용한다. 창립기념주일에는 시골교회 목사님을 초청해 간증을 듣는다. 그날 모아진 헌금은 모두 시골교회에 전달한다. 추수감사주일에는 온 성도들이 모여 김장을 했고, 쌀과 김장을 이웃에게 나눴다. 내 교회에 남기는 것은 거의 없다. 절기에는 모든 헌금을 교회 밖 이웃을 위해 사용한다. 성도들은 이런 섬김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섬김과 헌신의 신앙으로 무장한 곳, 바로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왕성교회다. 

▲ 이웃을 돕기로 작정한 성도들의 열매 앞에 선 박윤민 목사는 자신에게 과분한 성도들이라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왕성교회 담임 박윤민 목사는 개척 목회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의 교회사랑과 목회자에 대한 충성은 놀라울 정도다. 지난 26년 동안 담임목사가 보여준 삶이 그들을 변화시켰다. “이 마을에 교회는 필요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주민들도 박 목사를 보면 고개 숙여 인사부터 한다. 왕성교회에 부임하고 첫 전도에서 주민들에게 박대를 받던 때와 비교하면 정말 달라져도 너무 많이 달라졌다. 지금 왕성교회는 지역에서 없어서는 안 될 교회, 세상 사람들이 의지하는 교회, 그리고 무엇보다 목회에 지친 동역자들이 위로받는 교회로 든든히 서 있다. 그리고 그 비결은 박윤민 목사만의 독특한 ‘감동목회’에 답이 있었다. 

문닫는 교회를 일으켜 세우다
지난 11월 목회자 영성대회 강사로 나선 박윤민 목사는 “도농지역에서 아주 작고 초라하게 목회하고 있고, 부흥 가능성이 제로인 곳에서 26년 동안 목회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왕성교회는 인근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도, 주택단지도 없는 도로변에 홀로 서있다. 경기도 광주시로 진입하는 국도와 중대천 옆에 교회가 위치해 있다. 마을에 몇 가구를 빼고는 어디서 성도들이 모일까 싶은 외딴 곳이었다.

그런데 박 목사의 고백처럼 결코 작고 초라하지는 않았다. 주일이면 천 여 명의 성도들이 4부 예배를 꽉 채우고, 150여 명의 청년들은 활기가 넘친다. 다음세대 사역이 자랑일 만큼 교회는 젊고 역동적이다. 

30년 전 이곳을 거쳐 간 목회자와 성도들은 지금과 같은 부흥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교회가 있던 자리는 밭이었고, 농기구 창고를 개조해 예배를 드렸었다. 온갖 풍파 속에 몇 해 견디지 못하고 교회를 떠난 목회자만 5명이다. 장로교 간판을 걸었음에도 통합, 순복음, 합동, 감리교, 침례교 등 여러 교파에서 목사가 청빙됐다.

그러나 오래 견디지 못했다. 매일 싸우는 교회, 목사 내쫓는 교회로 소문이 나 동네 청년회와 부녀회에서 교회를 없애겠다고 결의된 상태였다. 이처럼 혼란한 공동체에 청빙된 박윤민 목사의 심정은 어땠을까? 차라리 개척을 하겠다던 박윤민 목사는 성도들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했다. 아직 신학교에 다니던 전도사 시절에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박윤민 목사는 ‘남들과 다른 목회’로 승부수를 걸었다. 

부임 직후부터 사례비 대신 선교비를 받아 자신보다 어려운 지역 목회자와 청소년들을 도왔고, 마을 주민들의 경조사는 다 좇아 다녔으며, 자가용이 아닌 자전거를 타고 온종일 마을을 누비며 전도했다. 그렇게 26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정말 왕성교회는 남다른 사역으로 한국교회에 신선한 자극을 주고 있다. 

▲ 왕성 공동체는 구제와 선교, 나눔에 앞장선다. 하는 일이 많고 바빠도 불평이 없다. 모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믿음으로 순종하기 때문이다.

‘절기목회’는 왕성의 자랑
“어려운 지역에서도 목회하면 됩니다. 환란 풍파가 있어도 목회는 됩니다. 그냥 한 자리에서 꾸준히 교회하고 집만 오갔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좀 예쁘게 봐주신 게 아닌가 싶어요.”

박 목사는 “저도 하는데…다른 분들은 더 귀하게 쓰임 받을 거”라며 겸손히 말한다. “저는 몸도 안 좋고, 얼굴도 못생기고,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비주류에요. 컴퓨터도 못하고 지금도 운전은 거의 안 합니다.” 세상의 기준이라면 그는 부족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한 없이 사랑스러운 아들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남들과 다른 목회의 비결은 기도에 있다. 매년 연말이면 기도원에서 일주일간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샘솟는 아이디어를 주신다. 농담처럼 “기도원에 다녀오면 성도들이 또 뭔 일을 벌이나 걱정부터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라고 하실 때, 돈이 없다고 거부한 적이 없다. 아프다고 게으름 피운 적이 없다. 무조건 하나님의 명령은 ‘선포’로 순종했다. 그리고 그 뒤를 성도들이 불평 없이 묵묵히 따라왔다. 지금 왕성교회가 생동하는 교회로 부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왕성교회만의 특별한 사역은 바로 ‘절기 목회’다.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 4대 절기와 창립기념주일에 들어오는 헌금은 무조건 이웃을 위해 사용한다. 부활절 헌금은 왕성교회 안에서 다음세대를 위한 장학금으로 사용된다. 맥추감사절 헌금은 지역 다음세대를 위해 투자한다. 지역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까지 연말이면 당연히 왕성 장학금을 기다린다. 추수감사절은 이웃교회와 지역주민, 홀로 사는 어르신 등을 위해 쌀과 김장으로 나눈다. 올 김장에만 2천500만원의 예산을 투입했다. 

성탄절과 창립기념주일 사역은 목회 동역자들에게 향해 있다. 개척 미자립교회 목회자와 농어촌 목회자를 돕고 그들이 다시 힘차게 목회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지금까지 성탄절에는 사랑의 박스를 만들어 지역 어려운 가정을 도왔는데, 올해는 4개 교회와 2개 기관으로 나눠 함께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하고 돌아왔다.

신림동의 한 작은 교회 목회자가 쓴 ‘성탄절이 너무 외롭고 쓸쓸하다’는 글을 읽고 나서 처음에는 목회자 가정을 초청해서 선물도 드리고 식사도 대접했다. 그러다가 올해는 긍정의 에너지를 나눠주기 위해 ‘흩어진 예배’를 기획했다. 성도 40명씩 6개 조로 나눠 작은 교회를 찾아가 함께 예배드리고 찬양하며 성탄의 기쁨을 나눴다. 성탄절 밤 청년들은 광주시내 파출소를 찾아가 새벽송을 돌며 선물을 전달했다. 

15년 전부터 창립기념주일에는 시골교회 목사님 부부를 강사로 모셔 예배를 드린다. 그날 나온 헌금은 동전 하나 빼지 않고 시골교회에 헌금한다. 교역자들이 무작위로 농어촌교회에 전화를 걸어 ‘경기도 광주 작은 교회인데 시골이야기 좀 해달라’고 초청하면 의외로 거절하는 분들이 많다.

그런데 부르심에 순종하여 발걸음을 옮긴 목사님께는 선물이 쏟아진다. 그날 헌금은 물론이고, 목사님께는 양복을, 사모님께는 한복을 한 벌씩 선물하고 근사한 식사까지 대접하면 목사님 내외는 눈물을 쏟는다. “평생 이런 호강은 처음”이라며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고 하고 돌아서신다. 힘든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감동목회’. 왕성교회 박윤민 목사의 사역은 바로 이 네 글자로 표현된다. 

▲ 추수감사주일 헌금으로 지역사회에 김장김치와 사랑의 쌀을 나누는 왕성교회 성도들

“퍼줄 수 있다면 감사한 일”
이렇게 다 퍼주고 나면 뭐가 남을까? 박윤민 목사는 “내 것도 아닌데 누구든지 줄 수 있다면 그것이 감사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저 “하나님께 나의 인생을 걸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그 믿음으로 순종한다. 이러한 순종은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그의 인생에서 얻은 깨달음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결핵에 걸렸어요. 중학교 졸업하고 무작정 서울에 올라가서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며, 저녁에는 야간 고등학교를 다녔죠. 각혈하면서 일했어요. ‘나는 얼마 못 살고 죽겠구나’ 생각했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고쳐주셨어요. 그러니 제 인생은 제 것이 아니죠. 하나님 것이죠. 살려주신다면 목회하겠다고 기도했고, 나처럼 돈 없는 신학생 돕겠다고 기도했는데 살려주셨으니 그 은혜를 갚으며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박 목사는 살면서 7번의 고비를 넘겼다. 초등학교 때 물에 빠져 죽을 뻔 했고, 결핵을 앓았으며, 자전거와 차가 충돌에 큰 상처도 입었다. 왕성교회 부임 후 그의 심방길에 동행한 자전거는 너무 오래 타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가 파열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교회 건축을 마치고 간경화로 6개월 간 목회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기억은 지금도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그런데 숱한 고비에도 그는 살아있고, 복음을 전할 수 있고, 성도들과 함께 나눌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지금 생각하면 제가 받은 복 중에 제일 큰 복은 바로 예수님을 만난 것이죠. 그 다음은 우리 아내를 만난 것이고, 또 우리 성도들을 잘 만난 것이죠. 몸도 안 좋은 목회자, 부족한 것 많은 목회자의 말에 ‘아니오’ 한 번 없이 따라주니 얼마나 감사한지....”

사실 왕성교회의 주인공은 박윤민 목사가 아니라 모든 섬김에 앞장 서는 성도들이다. 목사가 아무리 다양한 아이디어를 쏟아 놓은 들, 성도들이 외면하면 그 사역은 모두 중단된다. 그런데 성도들은 싫다 소리 한 번 없이 주님의 일이라면 앞장 서 순종했다. 박 목사는 “이런 성도들을 어디서 만나겠냐”며 “부족한 종에게는 너무도 과분한 성도들”이라고 모든 공을 돌렸다. 

헌금의 40% 가까이는 선교와 구제, 나눔에 쓰다보니 땅을 사지도, 건축헌금을 모아놓지도 못했다. 그래서 왕성교회는 1월 첫주부터 교회 인근 서울장신대 강당을 빌려 예배를 드린다. 강당을 사용하는 대신에 매달 천만원이 넘는 장학금을 기부하기로 했다. 당장은 학교 시설을 빌려 쓰지만 성도들이 함께 기도하고 예배할 수 있는 새 예배당을 건축하는 꿈도 꾸고 있다. 꿈을 이루는 일에는 늘 성도들이 동행한다. 그리고 왕성공동체는 고백한다.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이라고…. 

마음을 어루만지는 ‘감동목회’
국내 협력 선교지만 35개 교회, 후원하는 선교사만 23명, 특수협력선교와 학원선교 등 목회 첫 해부터 해온 선교는 전 세계로 향하고 있다. 힘겹게 목회하시는 목회자들이 안쓰러워서 노회 목회자 부부 제주도 여행으로 섬기고, 왕성교회에서 개척해준 교회 목회자 가정을 초청해 ‘청지기 위로회’도 연다. 은퇴한 목사님도 다섯 분이나 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 일주일에 한 번은 지역 목사님들과 함께 성경공부도 한다. 식사대접은 당연히 왕성교회의 몫이다. 그런데 아직도 박윤민 목사는 부족하다고 느낀다. ‘뭐 더 해드릴 것이 없나’ 그의 머릿속이 복잡하다. 

“사실 제일 큰 기도제목은 시골교회 목사님들과 어려운 선교사님들 보험 들어드리는 거예요. 노후에 아프기라도 하면 큰 걱정이니까... 암보험과 실비보장이 되는 보험 들어드리고 싶은데 1,000가정 이상 섬기게 해달라는 것이 기도 제목이에요.”
성도들보다 생활 여건과 수준이 떨어진다고 해도 목회자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독려하는 박윤민 목사. 목사는 양떼를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되고,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양육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가 세워진 이유는 전도”라며 “전도를 사명으로 알고 복음을 전하는 교회들이 많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우린 아직 개척교회”라고 말하지만 왕성교회는 어느 교회보다 풍성한 나눔을 실천하는 교회다. 하나님께서 남보다 더 주신 것은 작은 교회들과 어려운 이웃을 도우라며 주신 기회라고 고백한다. 세상을 비추는 밝은 태양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면 충분하고, 우리는 그저 어두운 밤에 의지할 ‘촛불 하나’면 그로 족하다는 박윤민 목사. 

분명 왕성교회는 지금까지 해온 것보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더 많아 보인다.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고, 지친 목회자를 살리고, 쓰러지는 한국교회를 살리는 것이 왕성교회의 사명인 것 같다. 예수님을 따라 ‘살리는’ 길로 나아가는 왕성교회는 그 이름처럼 ‘왕성’하게 부흥하는 남과 다른 교회로 빛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