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만8천명 피난민 살린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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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만8천명 피난민 살린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 이인창 기자
  • 승인 2018.12.19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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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기억해야 할 성탄절의 기적 - 흥남철수작전 ‘한국의 쉰들러’ 故 현봉학 박사

미 10군단장 설득해 함정과 화물선에 피난민 수송
국내 임상병리학 도입한 의사, 첫 민간인 6.25영웅

▲ 1950년 12월 군인과 피난민으로 북적이는 흥남부두 당시 모습. 민간인 약 10만명이 구출된 흥남철수작전은 성탄절의 기적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대로 철수하면 저 사람들은 다 죽습니다.” 2014년 12월 개봉해 누적 관객수 1400만명의 히트를 기록했던 영화 ‘국제시장’ 초반부에는 흥남철수작전 장면이 나온다. 한국인 젊은 통역관 한 사람이 당시 철수작전을 지휘하던 미군 장군에게 애원하면서 하는 대사이다. 

실존했던 두 인물. 한 사람은 당시 미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이고, 다른 한사람은 28살의 의사 출신 통역장교 현봉학 박사이다. 현 박사가 아니었다면 9만8천명 민간인의 생사는 장담할 수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마저도 현 박사와 당시 미군이 없었다면 자신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의 부모도 흥남철수작전으로 거제도에 정착해 그를 낳았기 때문이다. 한국판 쉰들러라 불리는 현봉학 박사를 성탄절에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 그 이유를 찾기 위해 그의 삶을 들여다보자.
 

피난민 위해 무기 포기한 위대한 선택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과 한국군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파죽지세로 북으로 진격했다. 그런데 12월 갑자기 대규모 중공군의 개입으로 철수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눈앞에 두고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병사들은 100년 만에 찾아온 맹추위와 사투를 벌이며 밀려오는 적을 상대해야 했다. 

특히 미 해병 1사단이 장진호에서 중공군 7개 사단에 포위된 채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하며 처절한 싸움을 이어갔고, 그 사이 유엔군과 한국군은 대규모 철수작전을 준비할 수 있었다. 기적적으로 퇴로가 확보돼 미 해병 1사단을 비롯한 부대는 흥남부두로 집결했다. 당시 군인만 10만 5천명. 2차 세계대전 당시 덩케르크 철수작전과 버금가는 최대 규모의 철수작전이었다. 

중공군과 북한군이 빠르게 남하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당시 민간인들을 돌볼 여지는 거의 없었다. 남겨둘 경우 적이 활용할 수 있는 군수물자도 배에 실어야 했기 때문에, 급하게 후방과 일본에서 불러온 선박의 공간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바로 그 때, 몰려든 피난민들을 태워달라고 간청하고 또 간청했던 인물이 바로 현봉학 박사였다. 전쟁터에서 무모한 요구였고, 엄청난 무기와 장비를 후송해야 하는 알몬드 당시 소장은 반대했다. 그래도 현 박사는 피난민들이 몰살당할 것이라고 설득했다. 

마음을 굳힌 알몬드 소장은 군수물자를 다시 내리고 피난민을 태우기 시작했다. 9만 8천명이었다. 특히 2천명만 태울 수 있었던 화물선 매러디스 빅토리호에는 1만4천명이 탔다. 그 안에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가 있었다. 10일간 철수한 끝에 피난민들은 경남 거제에 내려졌다. 항해 중 배안에서 5명의 아이가 태어났고 단 한명의 인명손실도 없었다. 2004년에는 ‘한척의 배로 가장 많은 생명을 구출한 세계기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6월 미국 버지니아주 장진호전투기념비를 방문해 “장진호 용사들이 없었다면, 흥남철수작전의 성공이 없었다면, 제 삶은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의 저도 없었을 겁니다”고 얘기한 적 있다. 

철수는 성탄절을 앞둔 12월 23일 시작됐다. 엄청난 무기와 화약, 장비들은 부두에서 폭파됐다. 피난민들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감사와 안도를 느꼈을 것이다. 성탄절의 기적이 일어났다. 

▲ 생전의 현봉학 박사.


“살리려면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현봉학 박사는 한국전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인이지만, 그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신앙이었다. 현 박사는 1922년 함경북도 성진에서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목을 지낸 현원국 목사와 대한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전국연합회 제14대 회장을 지낸 신애균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던 그는 공산 치하에서 기독교인을 비롯한 주민들이 박해 받을 것을 떠올렸다. 그토록 애절하게 배에 태워달라고 요청했던 배경이다. 현 박사는 자서전에서 “나는 번민으로 밤을 지새웠고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다하겠다 결심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결심한 대로 행동했다.

현 박사는 기독교 정신으로 설립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공부한 후 평양기독병원에서 인턴으로 근무했다. 해방을 맞아 서울에서 근무를 했던 그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애리스 윌리엄스의 도움으로 1947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윌리엄스 부인의 아들이 근무하던 미국 리치몬드 버지니아주립대학이었다. 기독교 신앙은 그의 삶의 근간이었다.

유학 중에는 국내에서는 생소한 임상병리학을 공부했고, 1950년 귀국해 모교에서 최초로 임상병리실을 세우고 후배들에게 새로운 학문을 전수했다. 

그러나 곧이어 한국전쟁 발발했고 그는 미국 유학의 경력을 살려 통역관으로 참전했다. 현 박사는 황성수 국회부의장 소개로 신성모 국방장관을 찾아갔고, 미 해병대 25사단 통역관으로 부임하기로 결정됐다. 

흥미로운 그의 흔적도 발견된다. 현 박사는 미군 부대에 부임하던 중 해병대 소령에게 납치되다시피 해병대 김성은 대령에게 붙들려갔다. 김 대령은 훗날 해병대 사령관과 최장수 국방장관을 지낸 믿음이 좋은 신앙인이기도 했다. 특히 그는 귀신잡는 해병의 역사를 만든 통영상륙작전을 이끈 인물이다. 

당시 김성은 대령은 젊은 통역관 현봉학에게 미 25사단의 신형무기를 확보할 수 있도록 요청했고, 하루 만에 현봉학은 무기와 탄약을 우리 해병대에 전달했다. 결국 현봉학 박사는 그해 11월 미 25사단 대신 강원도 고성에 주둔하던 해병대사령부에서 근무하게 됐다. 

바로 그 현장에서 미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을 만나게 된 것이다. 알몬드 장군은 고향 버지니아에서 유학한 현 박사를 신현준 해병대사령관에게 간청해 제10군단 민사부 고문으로 받아들였다. 전쟁 중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절묘하다. 9만8천명의 민간인을 구출해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은 사람과 인연이 아닐까 생각된다.

종전 후 현봉학 박사는 다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평생 미국 병원과 의대에서 후학들을 양성했다. 1988년 퇴임후 귀국해서는 국내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다 2007년 별세했다.

생전 현 박사는 “자신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아니며 수십만의 이산가족을 만든 장본인이나 다름없다”고 안타까워하며, “이산가족 재결합은 내 생애를 두고 노력할 일”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그의 소망은 이제 후배 신앙인들이 이뤄야 할 것이 되었다. 

한편, 국가보훈처는 2014년 민간인 최초로 6.25 전쟁영웅으로 현 박사를 선정했다. 2년 전 서울역 인근 연세대 세브란스빌딩 앞에 동상이 제막됐으며, 지난해에는 현봉학박사기념사업회(이사장:한승경)가 만들어졌다. 

올해 6월 새에덴교회가 주최한 한국전쟁 68주년 상기 참전용사 초청 보은행사에서는 현 박사의 가족이 방문해 감사가 전해졌다. 지난 10일 기념사업회는 현봉학 박사와 흥남철수 당시 민간인을 도왔던 미 해병대 포니 대령을 기념하는 행사를 갖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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