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서울역 사모님의 ‘번 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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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서울역 사모님의 ‘번 아웃’
  • 이현주 기자
  • 승인 2018.12.19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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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아이와 함께 서울역 ‘나누미’를 찾아가 급식봉사를 했다. 실내급식소 채움터에는 약 30명 정도의 자원봉사자들이 배식과 설거지를 나누어 담당했고, 노숙인을 비롯해 서울역 인근에서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약 300명의 사람들이 차례로 채움터를 찾았다. 예전에 비해 여러 면에서 발전된 모습이었지만 20~30대로 보이는 젊은 노숙인들이 증가한 것은 오늘의 시대를 반영하는 것 같이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나누미를 알게 된 지 20년이 넘었다. 처음 김해연 사모님을 만났을 때는 부엌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재료를 다듬고, 도와주는 봉사자도 없이 사모님 홀로 꽁꽁 얼어붙은 손을 녹여가며 음식을 만드셨다. 세월이 흘러 여건이 좋아지고 봉사자는 늘었지만 그렇다고 사모님의 일이 줄어든 것 같지는 않았다. 재작년 오랜만에 만났을 때 사모님은 평생 처음으로 동남아 여행을 다녀왔다고 자랑을 하셨다. 누구에게 맡길 수 없는 사역의 특성상 사나흘의 휴가도 그녀에게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사모님 손을 잡고 물었다. “그만 두고 싶지 않으세요?” “왜 아니겠어요. 하루에도 열두 번 넘게 이제 그만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그러다가 또 이렇게 나오면 내가 아니면 누가 하나 싶고...” 사모님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돈 받고 일하는 직장인도 한 자리에서 20년 넘게 같은 일을 하면 에너지가 모두 방전돼 ‘번 아웃’ 상태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휴가를 떠난다. 그런데 누군가를 섬기는 일은 휴가도 없다. 대신해줄 사람도 없다. 그래서 짜증을 참지 못할 때도 있다. 로봇이 아닌 이상 매일 웃으며 일할 수도 없다. 그런데 매달 찾아오던 봉사자들은 사모님이 변했다며 발길을 끊었다고 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20년 사역을 하나님은 아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먼저 동역자들이, 성도들이, 봉사자들이 알아주면 좋겠다. 번 아웃된 그녀가 다시 힘을 얻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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