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온 제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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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온 제네바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8.12.11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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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 칼뱅과 프랑스의 종교개혁(7)
▲ 황의봉 목사.

칼뱅과 파렐이 떠난 뒤, 제네바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공격 대상이 되었습니다. 개혁자들이 빠져나가자 로마 가톨릭교회 당국이 제네바를 회유하기 위한 공작을 벌이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위협에 당면한 제네바 시의 소위원회는 선동을 잠재울 대책을 강구하였으나 뾰족한 해답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유일한 대안은 칼뱅이 돌아와 민심을 수습하고 개혁 운동을 계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앞에서 1538년 선거에서 행정장관 4명 중 자유파가 3석을 차지했고 이들이 칼뱅과 파렐을 추방하는 데 앞장섰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칼뱅과 파렐을 추방하는 데 앞장섰던 네 명 중 한 사람은 살인 음모에 가담하여 참수형을 당했고, 다른 사람은 위조죄, 또 한 사람은 모반죄, 그리고 남은 한 사람은 검거되어 탈출하려다가 몸이 둔해서 상처를 받아 죽었습니다.

이렇게 칼뱅을 반대하는 자들은 다 제거되고 칼뱅을 좋아하는 사람들로 바뀌었기 때문에 제네바는 특사를 칼뱅에게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칼뱅에게 “어두움이 지난 후에 빛을 소망한다”라는 말이 겉봉투에 쓰여진 간절한 내용의 재청빙 서한을 보냈습니다. 이번에도 파렐의 경고와 권면 때문에 1541년 9월 13일 제네바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위스에 다시 돌아온 칼뱅은 제네바를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깨끗한 도시로 변화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먼저 교회 헌법을 만들어 총회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542년 최종적으로 국민 전체의 투표로 결정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네바 교회 헌법’입니다. ‘교회 헌법’은 지역 교회의 자율과 평등사상을 강조함으로 감독 정치에서 볼 수 있는 위계질서 사상을 배제하였고, 신약의 가르침대로 장로 정치의 골격을 유지하였습니다.

칼뱅은 치리법원을 세워 정부와는 별개로 파문권을 행사하였는데 치리법원은 아주 사소한 범죄까지도 검토하고 재판하였으며, 음탕한 춤, 가슴을 깊게 판 여인들의 의상, 카드놀이, 술 취하는 것 등도 심한 제재를 받았습니다. 제네바는 당시 악명 높은 매춘의 도시로 꼽히고 있었으므로 칼뱅은 이에 대해 매서운 태도를 취하고 보다 호된 처벌을 주장하였습니다.

칼뱅의 주장에 의해 술집들은 일단 문을 닫고, 보다 깨끗하고 질서 있는 카페들을 다시 열었습니다. 이곳에는 심각한 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참고 삼아 찾아보도록 하기 위해 프랑스어판 성경을 비치하도록 하였습니다. 마술, 이단, 간음, 신성모독, 난동 등 공공질서를 어지럽히는 심각한 범죄들은 정부에 이관되었습니다. 어떤 시민은 자기 개를 칼뱅이라고 이름 지었다가 감옥에 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법 집행 과정에서는 고문에 의해 자백을 얻어내는 사례도 허다하였는데, 4년 동안 58명이 처형당하고 76명이 유배당하였습니다.

칼뱅은 죽을 때까지 제네바라는 소공화국에서 거의 절대적인 군주로 군림했습니다. 그는 이처럼 지식의 노련한 힘과 인격의 영향력에 있어서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그 결과 제네바는 짧은 시간 안에 순결한 교회와 개혁된 정치질서의 영광으로 빛났습니다.

칼뱅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으며 수천 명의 학생들이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제네바로 몰려들었습니다. 또 여러 곳에서 폭정에 시달리던 많은 사람들이 칼뱅의 영향력과 그 지배 아래서 안전한 거처를 찾아 제네바로 이주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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