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에서의 칼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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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에서의 칼뱅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8.11.20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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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 칼뱅과 프랑스의 종교개혁(5)

파렐은 제네바 대의회에 칼뱅을 소개했는데 대의회는 칼뱅에 대해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마도 파렐의 동역자로 누구를 쓰든지 간에 별로 간섭하려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제네바 시 당국은 칼뱅을 그 이름조차도 거명하지 아니하고 ‘저 프랑스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제네바에 도착한지 한달 후에 로잔에서 가톨릭과 개혁자 사이에 성찬론에 관한 토론회가 열렸는데 칼뱅은 이 로잔회의에 참관자로 참석했습니다. 처음에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지만 로마 가톨릭측에서 교부들이 ‘실제 임재’를 지지하고 있다고 억지 주장을 하자, 그들의 무지와 억지를 보고 참지 못한 칼뱅은 마침내 침묵을 깨고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칼뱅은 비로소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인정을 받아 정식으로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칼뱅은 교회의 개혁을 기대하면서 파렐과 함께 ‘교회 행정에 관한 조례’를 시의회에 제출하였습니다. 이 조례는 4개 조항의 개혁안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① 바울의 가르침대로 찬송할 때 시편을 사용할 것, ② 매주일 성찬을 행할 것, ③어린이를 위한 교육을 실시할 것, ④ 결혼 법을 개혁할 것 등 이었습니다. 칼뱅은 예배의 개혁을 위하여 어린이 성가대를 조직하고, 어른들도 찬송에 참여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어린이들을 위한 요리문답서를 작성하였고, 결혼에 관한 규정을 마련하였습니다.
칼뱅은 로마 가톨릭교회와 재세례교도의 교리가 매우 위험한 사상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당시 제네바 시민들은 도덕성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마시고 흥청거리고 춤추고 놀음하고 거리에서 싸우고 외설적인 노래를 부르고 신성모독을 자행했습니다. 프로테스탄트주의는 도시의 도덕성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시의회는 ‘사치 금지법’을 제정하였습니다. 술집 영업시간이 단축되어 누구든지 밤 9시만 되면 가정으로 돌아가야 했고, 놀음도, 신성모독, 춤, 외설적인 노래, 소극(笑劇), 그리고 가면무도회 등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힘을 모으기 시작하였습니다. 수많은 제네바 시민들은 칼뱅이 본래 프랑스인이라는 사실과, 시내에 프랑스계 난민들의 숫자가 점차 증가해 간다는 데에 반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해 부활절 오전에 파렐의 설교가 끝난 후 목회자들은 성찬의 성격에 대하여 강해를 하였는데 특히 성찬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에 관하여 설명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자격자이기 때문에 성찬식을 거행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웅성거렸습니다. 칼을 빼들고 강단으로 달려드는 등 폭동이 일어나려고 했습니다. 
상황이 험악했지만 칼뱅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설교 도중 어떤 이들은 고함을 지르고 강단으로 달려드려는 등 난동이 일어날 직전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날 큰 불상사 없이 부활절 예배는 마쳤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날 대의회는 모임을 갖고 칼뱅과 파렐에게 사흘 내에 그곳을 떠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파렐은 뉴사텔로 돌아갔으며, 칼뱅은 바젤에 들러 잠시 머문 후 마틴 부처와 볼프강 카피토가 목회하는 스트라스부르크로 향하였습니다. 부처는 프랑스 피난민들을 위한 프랑스 목회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칼뱅을 스트라스부르크로 초청한 것입니다.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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