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뛰는 경험을 하고 싶다면 북촌으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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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뛰는 경험을 하고 싶다면 북촌으로 가라
  • 손동준 기자
  • 승인 2018.11.13 16: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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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르포]북촌 개화길 산책로

선배 신앙인들의 자랑스러운 흔적들 곳곳에
고운 한복 빌려 입고 걸으면 추억도 ‘두 배’

▲ 북촌 한옥마을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외국인 관광객들로 분주했지만 ‘핫플레이스’에 와 있다는 느낌이 나쁘지만은 않다. 분주함 속에 숨겨져 있던 개화기 기독교의 흔적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북촌이 초행은 아니었다. TV에서 며칠 걸러 한 번씩 북촌 이야기가 나오던 시절 누구나 북촌을 찾았다. 그때는 몰라봤다. 아기자기한 카페와 골목골목 자리한 주전부리 노점상에 취한 내게 한옥과 골목길은 보기 좋은 배경일 뿐이었다. 

두 번째로 걸어본 한옥마을은 처음과는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물론 길이나 건물이 목소리를 들려준 것은 아니었다. 누가 그랬던가. 인생은 누구와 동행하느냐가 5할은 먹고 간다고. ‘골목길 역사산책’(도서출판 시루)의 저자 최석호 교수(서울신학대학교 관광경영학)와 함께한 북촌 골목길 역사산책은 그래서 특별했다. 나무 하나 기와 한 장에 담긴 사연까지, 최 교수가 전하는 이야기는 흥미롭고 새로웠다. 그리고 북촌에 담긴 선배 그리스도인들의 흔적과 3·1운동의 역사가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때 아닌 가을비가 미세먼지를 내몰아 주어 청명했던 지난 9일, 그날의 북촌 개화길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안국역 2번 출구

지하철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를 빠져나오면 보이는 곳이 북촌로다. 편도 2차로 북촌로를 따라 약 125미터 올라가서 건널목을 건너면 헌법재판소다. 헌법재판소 자리는 홍영식의 집터. 선교사 알렌은 갑신정변 당시 칼에 맞아 죽을 지경에 이른 민영익을 살려내고 이곳에 왕립병원 제중원을 지었다.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로서 민씨 집안의 대표격이었다. 그를 살려낸 알렌은 이를 계기로 황실의 사람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헌법재판소 오른쪽 뒤편에 웅장한 재동 백송이 있다.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백송을 보러 이날도 많은 탐방객들이 찾았다. 서울 시내에 있는 백송은 이곳 재동과 조계사 백송, 원효로 백송, 통의동 백송까지 네그루가 대표적이다. 백송이 위치한 야트막한 언덕 아래에는 제중원 터가 있다. 건물은 없고 비석만이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주차장이 됐지만 눈으로 대강 봐도 그리 넓지 않다. 컨테이너 서너 개가 들어가면 꽉 찰 것 같은 크기다.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세브란스 병원이 이 작은 공간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이 놀랍다. 헌법재판소를 나오면 본격적인 북촌 개화길 산책이 시작된다. 가회동 백인제 가옥과 계동감리교회, 계동 배렴 가옥을 지나 중앙고등학교로 향한다. 중앙고등학교 숙직실 삼일당은 3.1독립만세운동을 처음 계획한 곳이다. 

중앙고등학교를 지나 언덕 왼쪽 골목길로 들어가면 북촌 한옥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한옥집을 배경으로 ‘셀카’ 찍기에 여념이 없다. ‘한옥’이라는 산책의 주 테마에 맞게 길가에는 돈을 받고 한복을 대여해주는 가게가 군데군데 자리하고 있다. 계절에 맞는 옷들을 여러 벌 보유하고 있으니 빌려서 입어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것 같다. 

경로 중간쯤에 있는 가회동 2층 전망대에서 잠시 쉬어간다. 백발이 성성한 노부부가 운영하는 이곳 전망대는 코코아가 맛있다. 산책길의 중간지점에서 최 교수와 음료를 시켜놓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상업화 되는 한옥마을

구한말 일본이 서울에 터를 잡기 시작한 곳은 남촌이었다. 청계천을 기준으로 남쪽 마을을 뜻하는 남촌은 지금의 명동과 충무로 일대를 지칭한다. 남촌은 예로부터 천민이나 ‘상농공’의 상민들이 사는 곳이었다. 일제가 식민 지배를 했지만 한양도성 안에서 북촌에는 섣불리 들어오지 못했다. 그러다 일본인이 점점 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북촌으로 침범하기 시작한다. 1920년 무렵이다. 일본인들은 ‘문화주택’을 짓기 시작한다. 입식부엌과 보일러가 설치된 가옥이다. 처음 지은 곳은 서촌이었다. 중인들이 사는 지역이었다. 그러던 것이 양반들이 사는 북촌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조선의 부동산업자이던 정세권은 식민지가 되더라도 조선의 정신과 사상이 있는 이 곳 북촌을 뺏길 수 없다는 생각에 문화주택에 대항할 수 있는 조선집을 짓기 시작했다. 현재의 복촌 한옥마을과 익선동 한옥거리가 정세권 한 사람에 의해 개발됐다. 이처럼 식민지가 됐어도 끝까지 자주적 민주화로 가는 그 다음 길을 준비한 사람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최 교수는 이런 상징적인 공간이 점차 상업적으로 변해가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나 속칭 ‘핫플레이스’가 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찾게 된 점은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인간이 살았던 모든 시대에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순수한 것만 남은 적이 있나요? 우리 스스로도 선과 악이 교차하는 양 극단 어느 곳에 있지요. 우리는 선에 가까울 수도 악에 가까울 수도 있습니다. 6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이 마을 역시 선과 악이 교차하겠지요. 당연한 일입니다. 그 정도 상업화로 이런 새로운 발견이 있었다면 충분히 용납할 수 있습니다.”
 

▲ 이날 북촌 개화길 탐방의 안내자로는 서울신대 최석호 교수가 함께했다.

대한민국은 기독교다

정세권을 비롯한 당대의 선각자들은 유학자였다. 유학자로 출발하여 기독교인이 되는 이들이 많았다. 기독교인이 되지 않았더라도 기독교 복음과 서양 선교사가 가져온 서양 학문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조선이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은 이 신지식에서 일종의 돌파구를 찾았다. 정동제일감리교회의 초대 한국인 목사 최병헌 역시 원래는 유학자였다. 그들은 일본식 근대화가 아닌 우리가 직접 받아들인 조선 버전의 근대화를 꿈꿨다. 

그리고 그 중심에 교회가 있었다. 교회는 일종의 ‘허브’였다. 중앙고등학교에서 처음 기획된 3.1만세운동이 교회를 통해 퍼져나갔던 것과 같다. 흥선대원군의 보부상 조직이 와해되면서 당시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가진 집단은 교회가 유일했다.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의 중심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흐름은 상해 임시정부로도 이어진다. 선교사가 세운 부산의 초량삼일교회의 윤현진 집사는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 찰스 어빈이 기부한 30만원을 직접 들고 상해 임시정부로 간다. 지금으로 따지면 아파트 600채에 해당하는 이 돈은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된다. 최석호 교수는 이 모든 과정에 중심이 됐던 교회를 지목하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이런 나라다. 이제 와서 대한민국 건국이 1948년이니 어쩌니 하는 말은 기독교정신의 정수를 반대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한민국 그 자체가 기독교의 정신에서 출발했다”고 말한 그는 “오늘날 교회가 지탄을 받는 것은 선배 기독교인들이 보여줬던 숭고한 정신을 상실했기 때문”이라며 씁쓸해 했다.

2층 전망대를 나와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북촌 6경으로 향했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다보이고 멀리 남산 타워가 자태를 뽐낸다. 맹사성 집터를 지나 삼청동을 오른쪽으로 끼고 내리막길을 걷는다. 석양이 뉘엿뉘엿 지는 오른편의 모습이 아름답다. 전체 코스를 다 돌아보는데 반나절 정도가 소요된다. 최 교수는 석양을 볼 수 있는 오후시간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북촌에 가보자. 북촌에서 아름다운 한옥뿐 아니라 우리 선배 신앙인들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맘껏 즐기고 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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