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의 독경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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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의 독경소리
  • 정석준 목사
  • 승인 2018.11.13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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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준의 시사영어 - 66

‘코트’족에 의해 서로마가 멸망하고, 기독교인들에게 아주 익숙한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세워진 이후 1000년 여간 동로마 제국의 역사를 만들어냈던 최고의 로마도시가 ‘콘스탄티노플’이다. 마치 몸이 구겨진 채로 신음하며 열한시간 넘게 비행기에서 몸부림을 쳐야 인천서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은 터키의 ‘이스탄불’로 불리는 도시이며 무엇보다 ‘사도바울’의 개척교회들이 세워졌던 고적을 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땅이다.

그러나 제대로 남아있는 유적은 없다. 다만 있었다는 돌과 기둥의 잔재와 기념한다는 성당이 몇 개 있을 뿐이다. 전국 어느 마을에도 교회 없는 곳이 없는 데가 대한민국이다. 당연히 너무도 익숙한 우리의 눈에 예배드리는 교회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사도바울의 일곱 교회의 자취는 고사하고, 종교개혁을 통해 피 흘려 일구어냈던 예수의 복음과 개혁교회의 정신 및 성도들조차 없다. 시간 맞추어 기도시간을 알리는 ‘Mosque’의 ‘minaret’에서 울려 퍼지는 독경소리만 온 도시에 홀로 가득한 곳이다.

이제 웬만한 사람이면 ‘비움’이란 단어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영어로 ‘케노시스(Kenosis)’라 하는데, ‘자기 비움의 용기’를 뜻하는 라틴어 ‘케네오(keneo)’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러나 원래 “예수께서 자신을 비워 종의 모습을 가지셨다”라는 성경의 구절 속에서 이 말은 시작됐다.(In Christian theology, kenosis is the ‘self-emptying’ of Jesus’ own will and becoming entirely receptive to  God’s divine will.)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원론적 사고’가 알렉산더를 통해 헬레니즘세계관으로 급속히 퍼져나가면서 ‘인문주의’의 고상한 가치를 나타내는 철학적인 용어가 된 것이다.

본질적으로 사람은 자기 속의 것을 비워낼 능력이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케노시스’하실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비운다면서 무엇이 되려 한다. 자기의 가치를 실현하고, 존재를 증명하려한다. 여기에 이스탄불의 고민이 있다. 권모술수는 있되 아무도 자기를 비우려하지 않는 우리의 정치적 모순의 모습도 살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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