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전도왕이 말하는 삶으로 전도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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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전도왕이 말하는 삶으로 전도하는 법
  • 손동준 기자
  • 승인 2018.10.22 19: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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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삶-전 고신대 의과대학 교수 이병욱 대암병원 원장

30년간 해외 오지에서 단기 의료봉사 펼쳐
웃음치료‧눈물치료 등 환자별 맞춤 ‘암 박사’
신앙 지키다 받은 고난도 모두 “은혜로 감사”

▲ 외과 전문의 및 소화기 내시경 전문의이자 전도왕으로 잘 알려진 이병욱 원장을 최근 이 원장의 개인전이 열린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만났다.

환자가 낫고 회복한다면 삐에로 분장도 마다 않는 의사가 있다. 어떤 환자이든지 수술 전에 반드시 기도해주고 열성적으로 전도하며 웃음과 사랑으로 행복을 전하는 의사가 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의 연장이라고 말하는 의사 이병욱 원장(대암의원)을 만났다.

전도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 원장은 암 치료의 대가이자 행복전도사로 진료에 각종 강연까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사람이다. 최근에는 신간 ‘삶이 전도한다’(도서출판 아르카)를 발표하고 말이 아닌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임을 한국교회에 호소하고 있다. 이토록 열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성공대로만 걸어왔을 것 같은 그에게도 어려움은 있었을까. 직접 만나 들어봤다.

 

의사 전도왕

부산 출신인 이 원장은 초등학교 2학년 시절 학급 친구를 통해 예수를 처음 알게 됐다. 당시 부급장이었던 어린이 이병욱의 눈에 급장 친구의 모습은 남들과 뭔가 달라 보였다.

“당시 저희 가족은 불교를 믿었어요. 그런데 저보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할 뿐 아니라 성격까지 ‘나이스’했던 급장 친구는 교회를 다녔지요. 식사 때마다 기도를 하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나도 믿어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부산대 바로 옆의 소정교회를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기독교인이 되기 시작한 것이죠.”

학창시절 미션스쿨인 브니엘고등학교를 다니게 된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지금 생각해도 감사한 좋은 교목들을 만났고 학교에서 개최한 부흥회에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믿어졌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고 그때부터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다. 나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 것.

1989년 6월에는 고신대 의대를 졸업하고 졸업생 신분으로 필리핀 의료선교에 참여하게 됐다. 7명의 의사가 선교지에 갔고 모두 480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그때부터 의사 전도왕의 삶이 시작됐다.

“천사 같은 아이들이 하나같이 남루한 옷에 모든 병을 다 가지고 있어요. 치아가 멀쩡한 아이 하나 없고…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야말로 엉엉 울면서 진료를 했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새벽에 저를 부르셨어요. ‘병욱아 네가 무엇을 봤니’하고 물으셨습니다. 신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들을 위해 10년간 해마다 의료선교를 오겠다고 서원하게 됐죠.”

선교와는 별도로 한국에서도 그는 기회가 되는대로 전도를 시작했다. 첫 번째는 어머니였다.

“어머니를 전도할 때 좋았던 게 제가 사고를 안치고 모범적으로 학창시절을 마쳤다는 점이었습니다. ‘엄마 나는 엄마랑 꼭 천국 가고 싶어. 내가 사고 안치고 시킨 대로 잘 했지? 이번에는 엄마가 내 말을 들어줘’했죠. 그렇게 어머니도 신자가 됐습니다. 그리고 전문의 시험을 준비할 즈음 새벽기도를 시작하셨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만나셨고 이제는 아버지도 독실한 크리스천이 되셨습니다.”

그를 수식하는 대표적인 이름이 ‘의사 전도왕’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를 하는 그를 주변에서 ‘전도왕’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원장은 “해외에서도 하는데 여기(한국)에서 못하면 믿음과 삶이 분리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크리스천에게 믿음과 삶은 같은 단어다. 믿는 만큼 행동하고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꾸준한 습관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 이병욱 원장은 최근 신작 '삶이 전도한다'를 펴냈다.

왕따? 왕은 따로 노는 사람

워낙 편안한 인상에 의사라는 직업, 누가 봐도 평탄한 길을 살아왔을 것 같지만 고난은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인턴을 1등으로 마친 그였지만 남들은 다 마다하는 ‘외과’를 선택했다. 신앙 때문이었다.

“선친이 병원장이던 선생님께서 어느 날 저를 부르시더라고요. 인턴 1등인 네가 외과를 택하면 특혜를 주겠다고요. 유학과 서울대 파견 등 여러 조건을 제시했지만 저는 다른 조건을 제시했어요. 전공의 4년간 동안 온전하게 주일 예배를 드리게 해달라고요. 그리고 술 담배를 하지 않도록 보호막이 돼달라고요. 가장 파격적으로 요청한 게 선교를 갈 수 있게 해달라는 조건이었는데 하나님 은혜로 감사하게 다 들어주셨습니다.”

그런 그를 주변 동료들이 고운 시선으로 볼 리가 없었다. 레지던트 시절은 사실상 ‘왕따’였다고 그 스스로 이야기 했다.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평안한 길이 아닌 힘든 길을 그에게 허락하셨다.

몸이 힘든 것보다 괴로운 게 관계로 인한 어려움이라고 하지 않는가. 살면서 들어보지 못한 모욕적인 말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졌다. 영혼이 피폐해져서 도망치고 싶었던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실제로 도망쳐서 숨어버렸던 날도 있었다. 한번은 아내에게 “여보 전문의 하지 말고 시골 가서 어르신들 진료하면서 살자. 이렇게 전문의 한들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느냐”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아내는 “여보 여기서 안 되면 거기서도 안 되는 것”이라며 “광야는 피하는 게 아니라 기뻐해야 하는 것”이라고 그를 달랬다. 그 말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광야를 피하면 또 다른 광야가 열리더군요. 이럴 때 저는 예배를 드리면서 회복했습니다. 정말 많이 울었던 시간입니다. 전문의를 따고 병원을 나올 때 저를 괴롭히던 선배들이 정식으로 사과 하더라고요. 그때는 그분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 같았습니다. 그분들 덕분에 수련을 잘 받았잖아요. 헤어지면서 ‘예수님 믿으세요’했는데, 거짓말처럼 그 말을 들은 분이 독실한 신자가 됐습니다. 하나님 은혜 아니면 설명 못할 일이죠.”

 

▲ 이 원장은 '웃음과 울음'이 암을 이기는 특효약이라며 한국교회도 과거와 같은 기쁨과 눈물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소로 암을 극복하라

그를 만난 곳은 인사동의 한 화랑이었다. 이 원장이 첫 번째 개인전 ‘행복한 그림’을 연 것. 전시회 이름처럼 모든 그림이 밝고 행복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워낙 행복한 사람이어서 이런 행복한 그림들을 그린 걸까? 그림을 보는 동안 오히려 역설적인 아픔이 느껴졌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2년 전부터입니다.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의사로서 소명의식이 부딪히는 일 등 여러 가지 요소가 겹치면서 마음이 어려웠습니다. 회복된 치유자라는 말이 있듯이 누군가 제가 지나온 발걸음을 따라 걸으면서 위로를 받기 바라는 마음에서 그렸습니다.”

지난 2년 동안 이 원장은 진료 틈틈이, 그리고 모두가 잠든 새벽에 혼자 깨어 그림을 그렸다. 원색의 환하게 웃는 그림 속 얼굴들은 레지던트 시절과 마찬가지로 광야를 피해가기보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돌파해 나간 흔적이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묵상하고 힘을 빼는 시간이었습니다. 제 마음의 빛과 색감을 화폭에 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림이 웃을 때 저도 행복했습니다. 저는 그림을 통해 무엇보다 마음에 평강을 얻었고 그리기에 집중하며 세상에 대한 산만한 마음이 정화됐습니다. 전시회를 통해 모든 분들이 웃음과 미소를 회복하면 좋겠습니다.”

암 치료의 권위자인 이 원장은 암을 유발하는 주요 원인으로 욕심과 스트레스, 많이 울고 웃지 않음을 꼽으면서 “웃음이 파도면 울음은 해일이다. 한국교회가 웃을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더 시급한 것은 예전의 믿음의 선진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슴 치며 우는 기도를 회복해야 한다. 더 웃고 더 울어야 한국교회의 아픔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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