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링거의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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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링거의 업적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8.09.19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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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불링거와 스위스의 종교개혁(3)

취리히 ‘최고 목회자’로 선출된 불링거는 교회와 정부 사이의 협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습니다. 여기에서 불링거에 의해 전개된 종교개혁의 지속성을 통한 취리히 시의 대표적인 교회적·사회적인 성과들을 몇 가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교회규범의 제정 : 불링거는 새로운 취리히 교회 ‘최고 목회자’로 선출된 다음 해인 1532년 10월 22일에 츠빙글리의 친구이자 동역자였던 레오 윳과 함께 작성한 ‘취리히의 설교자와 총회 규범’을 공포하였습니다. 이 취리히 총회규범은 크게 세 가지 항목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①설교자들의 선택, 파송 그리고 부양에 관하여 ② 설교자들의 가르침과 삶에 관하여 ③ 총회의 구성과 모임, 목사의 직무와 사역 그리고 교회와 정부에 대한 목사의 의무에 관하여. 이 교회 규범을 통하여 불링거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앙적 색채를 완전히 극복한 오직 종교개혁에 기반을 둔 취리히 교회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였습니다. 

(2) 공적인 교육에 대한 관심 : 불링거는 특히 목회자들의 더욱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을 위해서 취리히 학교들의 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처음 카펠 전쟁의 패전으로 취리히 시가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는 것과 관련하여 교회와 정부 사이에 교회재산의 사용에 관한 논쟁이 있었지만, 이후에 그로스뮌스터 교회의 자선기금과 다른 모든 교회재산들은 오직 학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쓰여져야 한다는 취리히 정부의 결정을 받아냈습니다. 특별히 교수들, 학교 공간, 공부 여건 등이 충원되고 개선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학생들이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학문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장학금 역시 지급되었습니다. 동시에 재능이 있고 성실한 학생들은 취리히 정부와 교회의 후원 아래서 신학과 의학 관련 분야를 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3) 목회자들의 처우개선 : 종교개혁 이후 취리히에서 수도원들이 폐지되고 로마 가톨릭 교회들이 개신교 교회들로 전환되면서 많은 사제들과 수도사들은 새롭게 개신교 목사의 신분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은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당시 어려운 현실 속에서 목회자들의 덕목으로 경건, 성실 그리고 청빈이 강조되기는 하였지만, 실제적으로 많은 목회자들이 빈곤 가운데 살아야 했습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 불링거는 취리히에서 활동하는 모든 목사들의 경제적 상태와 급료여건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목사들의 급료가 정부에 의해 보장됨으로써 목회자들의 부양 문제는 실제적으로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4)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부양 : 사회 개혁적 성과들과 관련하여서 츠빙글리가 가졌던 가난한 사람에 대한 관심 위에서 더욱 발전적으로 실행되었습니다. 불링거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보살핌을 단순히 먹을 것과 필요한 것을 일시적으로 공급해 주는 차원을 넘어서 직접적인 제도개선으로 확장시킬 수 있었습니다. 취리히 지역 내에서 고리대금업을 금지시켰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가난한 친척들의 돌보는 것을 의무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도로개설공사 같은 일자리 창출이나 수공업 관련 직업을 갖도록 지원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에게 수익이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 밖에 공공기금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땔감, 옷 그리고 집세가 보조됐습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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