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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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사람들
  • 노경실 작가
  • 승인 2018.09.19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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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실 작가의 영성 노트 “하나님, 오늘은 이겼습니다!”-60

잠언8:22-25>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지난 금요일. 시내의 한 음식점에서 작은 모임이 있었다. 그 자리에는 방송 PD, 화가, 등과 국내 양악수술의 최고 권위자인 의사도 있었다. 모인 사람마다 일하는 분야는 너무 달랐는데도 그 자리는 주인이 영업시간 다 됐다고 할 때까지 흥미진진하게 이어졌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바로 ‘얼굴과 성형’이라는 주제였다. 그러다보니 이야기의 주 발언자는 의사가 되었다.

양악은 양턱(위턱과 아래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한자어로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양악수술은 성형외과 소속이다. 성형외과? 그래서인지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양악수술이 유행처럼 되고 있다. 이런 현상에 큰 일조를 한 사람들은 연예인들이다. 턱, 입, 광대뼈 등등이 이상이 있거나 불만족을 가진 사람들이 수술 뒤에 그럴 듯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대중들이 따른 것이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통해서 100%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양악수술과정을 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 수술은 글로 표현하기에 너무나 거북한 장면, 감탄이 절로 나오는 놀라운 과정, 끔찍함으로 고개가 절로 돌려지는 장면, 그리고 의료진에게 존경심이 솟아나는 시간들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 결과는 환자들의 행복한 사람으로 이어지니 얼마나 고마운가! 하지만 외모지상주의의 풍조에 따라 턱이나 얼굴에 장애를 가진 사람들보다 단순 미용 목적으로 우리의 양악수술, 성형수술은 참으로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 날, 함께 자리한 사람들은 어느새 모임 취지는 완전히 잊은 채 양악이야기의 주제를 훌쩍 뛰어넘어 ‘얼굴과 성형’에 푹 빠졌다. 화가는 화가의 눈과 미술 이야기를 통해서 얼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PD는 연예인들을 통하여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교수는 대학생들의 유행감각을 예를 들며, 출판관계자는 인간의 얼굴에 대한 인문적 내용을 담은 책 속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그러나 역시 압권은 현장에 있는 의사의 말이었다. 모두들 웃다가, 심각해지다가 다시 웃다가를 반복하며 현대인들의 얼굴에 대한 집착과 욕망이 얼마나 강렬하고, 한탄이 나올 정도로 왜곡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아무 말하지 않고 듣고만 있는 내 마음은 답답한 나머지 화가 났다. 그 자리에 기독인은 나 말고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무슨 주제로 얼굴에 대해 이야기하든 나에게는 그야말로 허공을 향해 밀가루나 소금이나 설탕가루를 마구 뿌려대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내가 얻은 소득이 있다면 평소에 걱정하던 것을 더 확실하게 걱정하게 된 것이다.

세상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보암직한 것’에 집단최면에 걸려가고 있다는 것.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보암직한 것’ 외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는 것. 

‘보암직한 것’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바칠 수 있는 열정과 집착이 터질 듯한 풍선처럼 늘 팽팽하게 부풀어있다는 것.   

자신이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고, 누구의 손에 의해 숨 쉬고 있으며, 마침내 누구의 판단에 의해 지옥으로 갈지 천국으로 들어갈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 

그러기에 ‘보암직한 것’에 의해 자신의 행불행이 달려 있다고 믿는다는 것.

그리고 ‘보암직한 것’으로 미워하고 사랑하고, 무시하고 시기하며, 비굴해지고 오만해지며, 심지어는 죽거나 살 힘을 얻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세상이 사람의 껍데기로 천함과 고귀함을 가린다면…많은 사람들이 죽는 순간까지 고통과 자기비하에 짐승처럼 고개 한번 들지 못하고 살 것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 주님의 은혜는 껍데기가 아니다. 하나님은 해저 밑바닥보다 더 깊은 사람의 마음바닥을 헤아리시며 칭찬해주시거나 꾸짖으신다. 그래서 악취나는 노숙자에게서 주님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하고, 평생 사도신경을 외우지 못하는 촌로의 기도에서 주님 목소리를 들려주시기도 한다. 사지가 단 일분도 가만있지 못하는 뇌성마비 환우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주님의 웃음을 보여주시기도 한다.
 

함께 기도

우리를 만들어 주신 하나님, 신약성경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약과 달리 사람의 얼굴에 대한 이야기는 한 구절도 없으니까요. 또, 외적 묘사도 병자들의 상태를 설명할 때에나 나옵니다.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두 눈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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