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리히 ‘최고 목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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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히 ‘최고 목회자’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8.09.13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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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 불링거와 스위스의 종교개혁(2)

불링거는 언제 어떻게 취리히의 목회자가 되어 츠빙글리의 뒤를 이었을까요? 1531년 10월 11일 ‘2차 카펠 전투’에서 츠빙글리가 사망하자 자신이 목회하고 있는 브렘가르텐은 로마 가톨릭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는 수 없이 불링거는 다른 두 명의 목회자와 함께 떠날 수밖에 없었지요. 그의 명성을 듣고 바젤, 베른, 그리고 취리히에서도 그를 초청했습니다.

그중 취리히 지도자들은 불링거에게 시민 정치에 간섭하지 않고 오직 성경만을 강해한다는 조건으로 목회직을 제안했습니다. 성경에 모순된다 하더라도 시의회를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취리히 상·하 위원회는 27세의 불링거를 취리히 ‘최고 목회자’로 선출했습니다. 하지만 불링거는 취리히 성직자들이 동의할 때 이런 제안을 수락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최고 목회자’란 그리스어 ‘안티스테스’인데 스위스 개혁교회들에 속한 ‘교회의 의장’ 혹은 ‘최고 지도자’를 일컫는 칭호입니다. 울드리히 츠빙글리, 바젤의 오콜람파디우스, 그리고 불링거에게 붙여진 칭호입니다. ‘최고 목회자’는 시의회에서 선출되어 시 전체에 있는 교회들 중 하나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교회들을 대표하며 신학적 문제가 있을 때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사회도 맡았는데 지금은 이 명칭이 사라졌습니다.

‘최고 목회자’가 된 불링거는 설교자의 자유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설교의 내용이 정치적이든 무엇이든 신앙과 삶의 모든 부분에 대해 설교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시의원들도 그의 주장에 동의하여 불링거는 동역자들과 함께 취리히 교회 규정들을 작성했습니다. 그의 단순하고 실천적인 설교는 취리히에 츠빙글리가 다시 설교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시민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불링거는 취리히 교회들의 지도자라기보다는 모든 개혁교회들의 대표였습니다.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그리고 독일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취리히로 왔습니다. 프랑스의 위그노들을 위해 프랑스 왕 앙리 2세와 그의 아들 프랑수와 2세에게 두 차례 서신을 쓴 적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칼뱅과 멜란히톤을 비롯한 당시의 종교개혁 지도자들과 서신 왕래를 가졌습니다. 또 영국 왕들, 덴마크의 왕 그리스티안, 그리고 팔라틴의 선제후 프레더릭은 그의 자문을 얻을 정도였습니다. 특히 영국 왕 헨리 8세부터 ‘피의 여왕’ 메리 때까지 신앙의 핍박을 받던 개혁자들이 취리히로 피신해 왔는데 불링거는 그들을 사랑으로 환영했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27세부터 시작된 불링거의 목회는 44년 동안 수고하다가 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길을 다 걷고 난 불링거는 일의 과중으로 인해 건강에 해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허락하시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달려간 인물입니다. 불링거는 1564-1565년에 만연한 페스트로 인하여 아내, 세 딸들과 손녀가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불링거 보다 오래 생존한 자녀들은 겨우 4명이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그는 인내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마치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마침내 1575년 9월 17일 방광염과 신장염으로 인하여 완전히 여위고 힘을 잃은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때, 불링거는 취리히 정부와 국민들에게 한 교회를 이루며, 종교개혁의 유산을 지속해서 이행할 것을 호소하면서 눈을 감았습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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