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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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의 논쟁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8.08.14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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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츠빙글리와 스위스의 종교개혁(3)

(1) 1차 논쟁 / 첫 번째 논쟁은 츠빙글리의 친구 레오 유드가 피에르 대성당의 부목회자로 부임하며 발단되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가?”하는 문제로 어거스틴 수도사와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교회 안에서 ‘그렇다’고 하며 수도사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유드를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자 소의회에서는 양편을 모두 소환하였는데 이때 츠빙글리는 대의회에서 공개 논쟁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 논쟁을 보기 위해 1523년 1월 29일 600여 명의 사람들이 시청 건물에 모여들었습니다. 콘스탄스 감독은 참석하지 않고 요하네스 파베르를 대리자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츠빙글리가 ‘67개 논제’를 제출하며 기독교는 지난 1400년 동안 성경에도 없고 초대교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거짓 교리와 우상 숭배적 관습들을 지켜오고 있다고 강변하자 아무도 대꾸를 하지 못했습니다. 츠빙글리의 승리였습니다.
취리히의 미사는 1525년 4월 공식적으로 폐지됐고, 6월에는 교회당 안에 있는 모든 형상들이 철거됐으며, 성당의 벽들도 어둡고 침울한 색깔이 아니라 밝은 색으로 다시 칠해졌습니다. 회중들은 떡과 잔을 함께 받았으며, 성경이 읽혀졌고 성경은 최종적 권위가 되었습니다.

(2) 2차 논쟁 / 2차 논쟁의 논제는 십일조, 형상숭배, 그리고 미사 등 세 가지였습니다. 900여 명에 이르는 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논쟁의 주제는 형상숭배와 미사로 압축되었는데 시의회는 1차 논쟁의 결정대로 미사를 금지하고 형상숭배를 교회에서 사용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로마 교황의 잔재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면서 “종교를 시의회가 결정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콘라드 그레벨은 의회에서는 성상을 없애고 미사를 어떻게 하는지 논의할 수는 있어도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츠빙글리는 결정할 수 있다고 보고 미사의 철폐를 시의회에 맡겼는데 시의회는 사회의 분열을 염려하여 미사를 당분간 지속하도록 하였습니다.  

(3) 3차 논쟁과 재세례파의 등장 / 콘라드 그레벨은 ‘재세례파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는 츠빙글리가 꿈꾸는 개혁이 정착하는데 일선에서 헌신했지만 츠빙글리와 서로 나눠지게 되었던 최초의 이슈는 유아세례 문제였습니다. 1525년 1월 17일 세례에 대한 공개 논쟁에서 그레벨, 만츠, 그리고 빌헤름 유블린은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주장을 했고, 츠빙글리는 그들의 주장에 반박했습니다. 그러나 그 논의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습니다. 시의회는 츠빙글리의 견해를 채택했고 모든 유아들은 8일 만에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명했습니다.

그레벨을 중심으로 한 연구모임은 철퇴를 맞았습니다. 1525년 1월 25일 그들은 펠릭스 만츠의 집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얼마동안 진지하게 논의했고 눈물을 흘리며 진지하게 기도했습니다. 기도 후 게오르그 블라우록이란 사람이 일어서서 콘라드 그레벨에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블라우록은 세례를 받은 후 다른 형제들에게도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성인 세례였습니다.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재세례’가 주어진 것입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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