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리히로 온 츠빙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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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히로 온 츠빙글리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8.08.10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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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츠빙글리와 스위스의 종교개혁(2)

츠빙글리는 그로스뮌스터 교회의 청빙을 받아 취리히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사회 개혁을 기대하면서 1519년 1월부터 복음적인 설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츠빙글리의 설교는 담대했고 확신에 찼고 많은 대중들은 그의 설교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종교적 남용을 비판하는데 앞장서면서 일약 취리히의 종교적인 영웅이 되었습니다. 

1519년 8월, 흑사병이 취리히를 강타하면서 츠빙글리의 형제 안드레아스를 비롯한 취리히 시민 3분의 1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서둘러 취리히를 떠났으나, 여름휴가 중에 있던 츠빙글리는 급히 돌아와 위험을 무릅쓰고 죽어가는 취리히 시민들을 간호하였습니다. 결국 그도 1519년 9월 흑사병에 전염되었고, 1년 가까이 죽음의 문턱에서 고생하다가 1520년 여름에 이르러서야 겨우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투병 생활을 통해 츠빙글리는 그의 전통적인 가톨릭 신앙, 곧 동정녀 마리아와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신앙에 회의를 갖기 시작하였고, 하나님만이 모든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분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취리히에서 네 번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첫 번째 위기는 1519년 2월 면죄부 판매사건 때문에 있었습니다. 프란체스코 수도사 베르나르 삼손이 있어 취리히에서 면죄부를 판매했습니다. 츠빙글리는 당연히 반대하였습니다. 그러자 콘스탄스 감독은 교구 성직자들에게 삼손의 면죄부 판매는 교회를 위하는 것이기에 허용하라고 명했습니다. 하지만 취리히 시의회는 츠빙글리의 조언에 따라 삼손의 출입을 금했습니다.

두 번째 위기는 성직자들의 결혼문제 때문이었습니다. 당시는 성직자들의 결혼을 금지하고 있었지만 많은 성직자들은 이미 결혼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스 감독은 결혼을 허용해 달라는 제안을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다음 해 1520년 취리히 성직자들은 감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을 하였습니다. 츠빙글리 역시 1522년에 안나 라인하르트와 결혼했지만 비밀로 하다가 1524년 4월 교회에서 공개적 결혼식이 거행되었을 때 밝혔습니다.

세 번째 위기는 외교적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 찰스 5세와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는 이태리를 공격하기 위해 스위스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취리히 사람들은 황제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츠빙글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700명의 취리히 용병들이 전투에 참여했으나 많은 사상자들이 생겼고 또 약속을 받았던 보수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츠빙글리는 용병제도의 부당성을 설교했고 츠빙글리는 이때쯤 성직록을 포기하였습니다.

네 번째 위기는 흔히 ‘소시지 사건’이라 부릅니다. 1522년 츠빙글리는 디모데전서 4장을 설교하면서 교회가 정한 금식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사순절에 금식하지 않고 소시지를 나눠먹자 이로 인해 비난이 쏟아졌고 츠빙글리는 설교를 통해 금식을 하지 않는 것이 죄가 아니며 교회가 관련된 사람들에게 처벌할 수 없음을 강조했습니다.

츠빙글리는 1522년에 수도원 제도를 폐지하고 또한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는 가르침에 반대하며 그리스도는 단 한번만 희생제물이 되었음을 가르쳤습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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