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에서도 오를 수 있길”…백두산 천지에서 외친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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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서도 오를 수 있길”…백두산 천지에서 외친 통일
  • 이인창 기자
  • 승인 2018.07.23 22: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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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2018 북중접경지역을 가다

압록강에서 생업 北 주민들, 나무는 여전히 적어
해발고도 2744m 백두산, “통일은 우리의 소원”

6년 만이다. 2012년 9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중국 애덕기금회를 통해 밀가루 154톤을 지원할 때 동행 취재한 이후 근 6년 만에 중국 단동 땅을 다시 밟았다.

한국전쟁 때 끊어졌다는 압록강 단교도, 북중 무역물자가 드나드는 교역 통로 압록강 철교도 여전했다. 1960~70년대 거리 풍경이라고 했던 단동 시내는 조금 더 세련되어진 것 같았지만, 그간 경험했던 중국의 다른 대도시에 비해 변방이라는 느낌은 여전했다. 

지난 7월 16~20일 4박 5일 간 한국기독교연합(대표회장:이동석 목사)이 주최한 ‘2018 백두산 평화통일기도회’ 일정을 동행 취재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관계가 좋아졌다고 하지만, 북한 땅을 밟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은 때, 인접한 중국 땅에서 바라본 북한은 6년 전과는 또 다른 느낌을 전해주었다. 

▲ 북중접경지역을 탐방한 한기연 일행은 압록강가에 나와 있는 북녘 주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진한 동포애를 전하고자 했다.

압록강 너머에 전하는 동포애
인천국제공항을 떠나 1시간 10분 만에 중국 대련공항에 도착했다. 다시 버스를 타고 4시간 동안 300km 이상을 이동한 끝에 압록강 하구에 다다를 수 있었다. 두 번째 만나는 압록강은 예전보다 흐린 것 같았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 수일 동안 비가 내렸기 때문에 물이 꽤 불어난 듯했다. 

우리는 단동시 외곽으로 1시간 가량 벗어나 쾌속 보트를 한척 빌려 강 위에서 북한 땅을 돌아보기로 했다. 배는 우리 일행이 타기에 적당했다. 현지 안내인은 올해 수풍댐까지 올라갈 수 있는 루트가 개발됐다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이미 여러 해 전부터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탐방길이다. 

6월인 만큼 북한 땅에는 초록빛 물결이 가득했다. 북한의 산야는 묘한 아름다움과 매력을 선사해주었다. 예전보다 나무가 조금 더 늘어난 것 같긴 했지만, 여전히 압록강 바로 옆에서부터 산 능선까지 옥수수가 심어져 있었다. 중국 쪽에는 소나무 등 침엽수가 많은 것과 대조되는 풍경이다. 

우리가 남한에서 왔다는 사실은 안 선장은 가능한 북한 땅에 가깝게 운항해 주었다. 강가에는 빨래를 하러 나온 여인, 소와 염소에게 풀을 뜯기러 나온 아이들, 우리의 항해를 유심히 지켜보는 경비병들까지 다양했다. 특히 나무배를 타고 그물을 치고 있거나 고기를 기다리는 어민들이 3~4명씩 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 뒤편으로는 옥수수밭과 시멘트 블록으로 지어진 허름한 건축물이 알 수 없는 흰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북한 주민들을 보면서, 2012년 당시 달러와 생필품을 병사들에게 던져주었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 작은 나무배를 타고 압록강가에 그물을 놓고 있는 북한 주민들. 주민들은 보통 공동 어로활동을 하며 수익을 나눈다고 한다.

우리 일행들은 “사랑해요”, “통일이 되면 다시 만나요”를 끊임없이 북녘 땅 동포들에게 외쳤지만, 노인과 아이들을 외에는 대부분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최근 남북관계 영향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의 인사를 싫어하거나 강하게 거부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맘에 들지 않았다면 짱돌이라도 던질 수 있는 거리였다.  

배는 수풍댐 앞에 잠시 멈추었다 회항했다. 일제에 의해 건축돼 한국전쟁 때 수차례 공습된 바도 있는 수풍댐. 한 때는 동양 최대 수력발전소로 이름을 날렸던 곳이다. 같이 간 60~70대 목회자와 장로들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곳이라고 유심히 살펴보기도 했다. 댐 옆에 설치된 ‘위대한 김일정-김정일 주의 만세’라는 문구가 북한 땅임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경기도 가평 항사리교회 이주형 목사는 사모와 두 딸과 함께 참여했다. 이주형 목사는 “우리 자녀들은 북한에 대해 관심이 적은 세대들이다. 이 아이들에게 복음적 통일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싶어 휴가라고 생각하며 참여하게 됐다”며 부지런히 자녀들과 통일에 대해 소통했다.  

▲ 백두산 서파 루트를 따라 오르는 계단 1442개. 선명한 산과 하늘은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정상을 향한 기대감을 더욱 안겼다.

운무 한 점 없이 허락된 백두산과 천지
이번 북중접경지역 루트에서 모두의 기대를 모은 것은 역시 백두산 천지 탐방이었다. 단동에서 다시 400km 이상을 버스로 이동했다. 중국 정부는 백두산 서파와 북파 코스를 개발하고, 현재는 남파 코스까지 개발하며 관광객들을 모으고 있었다. 

남북관계가 좀 더 좋아진다면 북한을 거쳐 백두산에 오를 수 있진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컸다. 백두산 해발고도는 2744m. 중국인들이 장백산이라는 부르는 입구에서 약 1시간 동안 관광지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 길을 따라 천지를 향해 올랐다.

2100m 이상을 넘어가면서 나무들의 수가 급격히 줄었다. 너른 초장이 펼쳐지고 그 속에 피어있는 갖가지 야생화들은 무척이나 예뻤다. 

서파 루트를 선택한 우리는 1442개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파랬고 선명했다. 구름을 찾기 어려울 정도의 날씨는 일 년 중에도 몇 차례 되지 않는다고 한다. 계단을 오르며 정말이지 돌 하나, 풀 하나, 바람 한점 놓치고 싶지 않았다. 

중국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쏟아냈지만, 아랑 곳 않고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침잠할 수 있었다. 마침내 드러낸 천지는 알 수 없는 뭉클한 마음을 갖게 했다. 

▲ 민족의 명산 백두산은 해발고도 2744m로 현재는 중국이 개발한 루트로만 등정할 수 있다. 지난 18일 서파 루트로 오른 백두산은 운무 한 점 없는 천지의 위용을 드러냈다.

예장 통합 여전도연합회 신선 전 총무는 “간밤에 천지를 볼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했는데 응답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제가 1944년생인데 더 나이 들기 전에 언젠가는 꼭 북한 땅을 거쳐 백두산에 다시 오고 싶다”고 감개무량해 했다. 

1980년대 후반 한국교회 통일운동 역사 현장을 지켰고, 이후 수많은 남북교회 대표가 만나는 회담 현장에 여성대표로 참석했던 신 총무이지만, 백두산과 천지는 북녘 동포들과 신앙의 동지들을 더욱 떠올리게 만드는 장소였다. 

평양조용기심장병원 조성 초기 단계부터 수차례 평양을 방문했던 기하성 여의도 최길학 전 사무총장(한기연 법인이사) 역시 백두산에서 남다른 감회를 느꼈다. 

최 목사는 “북한에는 자주 갈 기회가 있었지만 백두산 천지는 이번이 처음이다. 남북관계가 악화돼 병원 공사는 중단됐지만, 하루빨리 공사가 재개돼 한국교회가 북한의 주민들과 호흡하고 섬길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으면 한다”고 기도하는 마음을 전했다. 

흔히 삼대가 덕을 쌓아야 천지를 볼 수 있다는 말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첫 방문에 천지가 허락된 것은 삼대가 기도한 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며 혼자 웃어보았다. 

▲ 백두산 정상 표지석에는 '中國'이라고 글귀가 쓰여 있다. 그 뒤편에는 북한을 뜻하는 '조선'이라는 글은 난간에 기대 겨우 손을 뻗어서야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중국 정부에 의해 탐방객들에게 허락된 천지는 넓지 않았다. 표지석에는 중국이라는 한자가 적혀 있었지만 그 뒤편에는 ‘조선’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중국 인부들이 나무 난간을 만들며 북한 땅을 밟고 있었지만, 우리는 한발자국도 안에 들일 수 없었다. 

우리 일행은 관광객들이 몰려있는 곳에서 조금 벗어난 한 켠에서 찬송가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와 ‘우리의 소원을 통일’을 불렀다. 그리고 복음적 평화통일을 위해 손들고 기도했다. 

이제는 내려가야 할 시간. 제운봉에서 내려다본 천지와 초원, 멀리 장군봉까지 하나라도 더 눈에 담아가고자 모두들 노력했다. 왜 이리 아쉬울까. 왜 이리 아련할까. 하산하면서 돌 몇 개를 주머니에 담아왔다. 북한을 거쳐 백두산에 다시 오른다면 그 돌을 다시 들고 올 참이다. 중국 단동=이인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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